낡은 재킷의 온도
오랜만에 본가에 왔다. 현관문을 여니, 갓 지은 밥 냄새와 된장국의 구수한 향이 먼저 다가왔다. 식탁 위에는 반들반들한 젓가락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엄마는 앞치마를 정리하며 환하게 웃었다. 아빠는 TV 리모컨을 내려놓고, 오랜만이란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부모님은 언제나 내 모든 명찰이 자신들의 인생 성적표라도 되는 듯 자랑스러워했다. 문득 궁금했다. 명찰을 모두 떼어 낸 나라도, 여전히 사랑해 줄까.
그때 아빠의 목소리가 머릿속 의문을 걷어냈다.
“수연아, 이 재킷 아빠한테 영 별로지? 비싼 돈 주고 샀는데, 괜히 샀다.”
멀쩡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재킷을 버린다니, 아까웠다. 나는 키가 크고 아빠는 작아서, 재킷이 내 어깨에 딱 맞았다. 거울 앞에 서 보니 낯설지만 이상하게 어울렸다. 단추 방향이 여자 옷과 반대라 어색했지만, 요즘은 오버핏이 유행이니까 괜찮겠지 싶었다. 재킷은 오래 입지 않은 듯했지만 단정했다. 천에는 아빠의 향이 진하게 배어 있었고, 먼지 냄새와 섞여 있었다.
그날 저녁, 예매해 둔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갔다. 아빠의 재킷에 검정 원피스를 매치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거리를 걸었다. 출근길엔 늘 돌덩이를 단 듯 무겁던 다리가 오늘만큼은 놀라우리만치 가벼웠다. 도심의 불빛이 어깨 위로 미끄러졌고, 발끝은 바람을 밟듯 가벼웠다.
표를 건네고 문을 밀자, 묵직한 공기와 함께 따뜻한 조명이 얼굴을 감쌌다. 객석에는 속삭임과 웃음이 스며 있었고, 향수와 낡은 가죽 냄새가 뒤섞였다. 나는 아무도 예매하지 않는 3층 오른편 끝자리를 골랐다. 음악에 살짝 몸을 맡겨도 눈치 보이지 않을 자리였다.
7시 20분, 공연 시작 10분 전이었다. 안내원들이 입장을 재촉하자,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메워 갔다. 그때 왼편 끝자리에 한 남자가 앉았다. 내 계획은 틀어졌다. 혼자만의 시간은 거기까지였다. 남자의 실루엣이 어쩐지 낯익었다. 자세히 보니, 그는 나와 같은 재킷을 입고 있었다.
인터미션 시간이 되었다. 그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키는 175쯤, 머리엔 은빛이 섞였지만 정갈한 인상이었다.
“우리 딸이 사준 재킷이랑 똑같네요. 너무 신기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있어야죠.”
남자는 멋쩍은 듯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이것도 우리 아빠 옷이에요. 비싼데 버리기 아까워서 제가 얻어 입었죠.”
나는 괜히 재킷 깃을 만지작거렸다. 아빠 얘기를 꺼내자, 옷감 사이로 먼지 냄새가 더 짙게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하하, 우리 딸도 이거 사주면서 넋두리를 한참 했어요. 서울에서 집 한 채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이거, 비싼 뇌물입니다. 곧 은퇴인데, 무능력한 아빠라도 애가 좋아해 줄지 모르겠네요.”
순간, 남자의 미소가 조금 흔들렸다. 그 얼굴이 이상하게 내 아빠를 닮아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자 현관 불빛이 어스름하게 번졌다. 나는 TV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빠를 작게 불렀다. 그리고 초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아빠를 안았다. 두껍고 거칠어 나무통처럼 단단했지만, 그 품에서 오래된 온기가 천천히 내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낡은 재킷의 아빠 냄새가 뺨에 닿았다. 오랫동안 맞춰 입던 옷처럼, 마음이 따뜻해졌다.
누군가의 자랑이었던 내가, 이제는 누군가의 위로가 되고 싶어 쓴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