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기 4
저녁을 먹을 겸, 일몰쯤 가기 좋다는 포폴로 광장과 핀초언덕으로 향했다. 이때는 같은 새미 패키지에 참여한 동생과 동행했는데, 여행에 와서 처음으로 누군가와 긴 대화를 나눈 시간이었다. 나는 왜 이곳에, 어떻게 이곳에 왔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이어졌다. 혼자 왔지만, 이야기를 나눌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귀중하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또한 하나의 여행이 되기 때문이다. 동생은 로마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참이어서 여행보다는 한국에서의 고민이나 걱정거리, 어떤 것들을 뒤로하고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보다 6살 어린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서 가지고 있던 고민을 털어놔 주었다. 어쩌면 나도 그때 가지고 있던 고민이었다. 아니, 사실 지금도 가지고 있고 풀어가고 있는 고민이기도 했다. 나는 어떻게 나일 수 있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메아리치기만 반복하는 물음에 대해. 너와 나도, 우리와 누군가도 하고 있는 인생의 물음이기도 할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써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우리가 함께함으로 각자의 답에 가까워지기를 희망할 뿐이다.
식사를 마치고 핀초언덕을 올랐다. 언덕을 오르기 전부터 하늘은 붉게 물들어있어 마음이 급해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언덕 위에는 이미 일몰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인터넷 배경화면으로 검색되던 풍경이 눈앞에 있었다. 넓은 광장을 발아래로, 비슷한 높이의 유럽식 건물들이 옹기종기 수평선을 이루며 혹여나 구름에 닿을까 조심스러워하는 듯했다. 그 위로 아기 구름들이 보랏빛 망토를 두르고 칙칙폭폭 기차놀이를 했다. 그 풍경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사람들도 저마다의 사랑스러움을 내보이며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포옹하고 입을 맞추고 한껏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풍경과 자신의 모습을 담고자 했지만 두 가지를 다 카메라에 담는 것은 욕심이었다. 붐비는 사람들 사이에서 펼쳐진 아름다움을 모두 담기에는 손 안의 작은 우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은 어떤 무용한 것들은 그 순간에 존재하다가 어느 곳에도 잡히지 않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여행이란 나에게 있어 사치에 가까운 일이었다. 시간과 비용이 그만큼 드는 일이기도 하고, 여행에서 얻어 온 것이 뚜렷하게 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의 가치라면 새로운 시각과 넓은 세계의 경험, 문화 체험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의 경험으로 내재될 뿐. 투자 대비 효용가치가 증명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력서의 이력으로 기재되지도 않고, 자기소개서의 한 줄로 마무리된다면 인턴쉽이나 봉사활동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시간 또한 놓칠 수 없는 자원이었고, 여행을 갈 여력도 없었으며 어서 빨리 돈을 벌기 위해 고군분투해왔기 때문이다.
여전히 여행의 가치를 증명하라고 한다면 역시 명확하지 않은 추상적 요소들만 떠오른다. 하지만 나는 계속 그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의미를 정돈하고, 그 시간에 있던 나를 떠올리고 추억하며, 그곳에 존재했던 자신을 수용한다. 적어도 나와 화해하는 시간인 것이다. 이곳에 온 것은 나를 돌보고 나를 자유롭게 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살아가면서 어떤 경계를 세우고 이분법적 사고로만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와 다른 것을 수용하고 인정할수록 개인의 세계는 넓어지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것이 살아감에 있어 충분한 행복의 향유 혹은 목적으로써의 가치를 가짐을 인정하게 되었다. 내가 경계했던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 이 또한 여행의 이유가 되겠지.
한 달가량의 여행을 하며 여행에 대한 이유를 명확히 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여행을 갈망할까? 어떤 이들은 여행을 위해 돈을 벌고, 여행이 인생의 중요 가치 중 하나라고 여기기도 한다. 물론 현실로부터의 도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 노동과 책임이 없는 상태에서 오는 자유로움. 너무나 홀가분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상태가 지속되지 않는 것이 더욱 슬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하나씩 이유에 살을 덧붙여 갔고, 막바지에는 이유를 그러모으곤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천천히 내가 모아 온 이유들을 소개하고 싶다.
아! 그리고 드디어 에스프레소를 먹었다.
생각보다도 부드러워 목넘김이 좋았다. 적당히 진하고 약간의 단맛도 느껴졌다. 정말로 두 모금 만에 없어져 아쉬웠는데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은 꼭 하루 한잔씩은 먹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