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바퀴를 돌고 나서야 마주한 마음

유럽 여행기 5

by 윤음


오늘은 드디어 공식적인 새미 패키지 일정의 시작이다. 참여한 사람들과 두 명의 인솔자님을 만나 간단한 시내 투어를 진행했다. 스페인 광장, 트래비 분수, 판테온 신전, 산타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까지 둘러본 후 자유시간을 가졌다. 역시 설명을 듣는 것과 그냥 보는 것의 차이는 크다. 원래 역사에 큰 관심은 없었지만 유럽이란 도시의 모습은 역사로 하여금 시작되기 때문이다. 옛 유적을 그대로 보존해 놓은 구도심 중심으로 주변에 신도시를 구축한다. 이것이 유럽 도시계획의 토대이다. 그리하여 10년 전, 50년 전 유럽을 여행하며 기념사진을 찍으면, 나중에 다시 오게 되더라도 그 배경 그대로 남길 수 있다. 일행 중에도 어릴 적 왔을 때 찍어뒀던 기념사진을 그래도 재현해 찍는 이가 있었다. 혹은, 부모님이 다녀갔던 그 자리에 훌쩍 커버린 자녀가 와서 같은 사진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 급변하는 시대에 어쩐지 뭉클해지면서 오래도록 남길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존재감으로 증명하는 듯했다. 비록 시간이 지나 그때 들었던 역사적 의미와 일화를 뚜렷하게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건축물을 휙 지나치기만 했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어떠한 이야기는 우리를 스치듯 지나가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축적되어 그 사람을 구성한다. 우리가 읽었던 책과 배웠던 내용을 전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독서와 배움이 의미 없는 일이 아니듯이 말이다.


KakaoTalk_20220918_012955971.jpg
KakaoTalk_20220918_012955971_02.jpg
KakaoTalk_20220918_012955971_01.jpg
트레비분수 앞 / 미네르바 성당 천장화 / 판테온 내부


자유시간에 유명하다고 하는 카페에 갔다. 자리가 없어 서성이다 물었더니 10분 정도 기다리면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했다. 이미 더위에 지친 우리는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웨이터보다 먼저 빈자리를 향해 물었다.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요? 웨이터는 알겠다고 테이블을 정리해 주겠다며 분주히 움직였다. 한참 다른 곳을 구경하다 어서 앉고 싶었던 우리는 테이블을 둘러싸 그의 분주함을 지켜봤다. 이 더위에 유니폼을 입고 바쁘게 움직이는 웨이터에게 들고 있던 손선풍기를 대주었더니, 그가 행복하게 미소 지었다. 오~ 마담~ 그의 얼굴에 잠시 편안함이 내려앉았다. 그는 의자에 기대는 시늉을 했고, 잠시 동안 한껏 바람을 느꼈다. 순간 주변에 있던 모든 테이블에서 옅은 미소와 웃음이 번졌다. 그는 가볍게 남은 테이블 정리를 마쳤다. 어쩐지 이곳의 기온이 한층 낮아진 듯했다.


KakaoTalk_20220918_012955971_03.jpg 산 에우스타키오 카페


자유시간 이후 다시 모여 나보나 광장, 포로 로마노, 콜로세움까지 보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태양도 로마의 유적을 관찰하고 있는 듯 뜨거웠으므로 불같은 더위에서, 교과서나 영상으로만 보던 트레비 분수, 판테온, 콜로세움 등 유적을 볼 때마다의 감탄으로 우리는 불지옥과 천국을 오갔다. 우리의 투어는 콜로세움에서 마무리되었는데, 패키지의 시작이자 오늘의 마지막 장소에서 인솔자님은 얘기하셨다.

여러분, 유럽까지 왔으니 이제 자유로워집시다. 이곳은 자유의 나라예요. 서로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다 하세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여기서 노래 한곡 해드릴게요. 눈치 보지 마세요 여러분! 아시겠죠?

라고 하며 정말로, 갑자기 사람들이 휙휙 지나가는 길에서 노래하셨다. 그것도 아주 멋지게. 자유롭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나는 그 말이 얼마나 고팠는지 모른다. 그리고 행여 들었어도 얼마나 허기졌었는지 모른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주변을 의식하고 스스로를 제단 하며 살아왔는지. 실체가 없지만 분명한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고통받아왔는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닌 정말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눈으로 본 그 순간, 나는 치유받았고 마음이 배불렀으며 그 어느 때보다 안도할 수 있었다.


이 말을 듣기 위해 이곳에 왔구나.




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하고 7시가 넘어 숙소에서 나왔지만 태양은 개구진 어린아이처럼 기다렸다는 듯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몸에 매달렸다. 그렇다. 유럽의 해는 8시는 훌쩍 지나서야 떠날 채비를 해 9시쯤이 되어서야 지는 것이다. 보통 저녁식사는 6시 즈음부터 시작하니 어두워지기 전까지 유럽의 저녁은 꽤나 넉넉하다. 어둠이 내리면 저마다의 엔딩 포즈를 뽐내는 가로등이 주홍빛으로 거리를 비추고, 건물들은 저마다 조명의 치장을 마친다. 아름답다. 더욱이 이 순간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로마 거리 곳곳에 울려 퍼지는 노래다. 피아노, 기타, 노래, 하프 등 다양한 버스킹을 들을 수 있는데 뭐하나 수준급이 아닌 것이 없다. 뭐하나 지금의 순간을 영화로 만들지 아니하는 것이 없다. 그들의 연주가 이토록 감명 깊은 이유는 연주하는 이의 얼굴에 행복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천사의 성, 천사의 다리에서 하늘과 땅의 빛깔, 음악을 들려주는 이의 모습과 그 선율로 하여금 여러 번 감동의 순간을 맞이 했다.


KakaoTalk_20220919_012014117.jpg
KakaoTalk_20220919_012017614.jpg
KakaoTalk_20220919_012015374.jpg
천사의 성 앞, 멀리 보이는 베드로 성당의 야경


음악이 울려 퍼지는 동안 삶에서 빠져있던 조각이 채워지는 듯했다. 이제껏 행복은 좀 더 미래에, 좀 더 나중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언젠가 올 행복을 기다리고 꿈꾸며 산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곳에 울려 퍼지는 선율은 내 머릿속의 다른 모든 생각들을 가뿐히 쓸어버리고 기어코 나를 행복의 의자에 앉혔다. 이곳에 와서 다행이다. 오늘을 아주 오랫동안 꺼내 먹으며 살리라.


이전 04화나는 어찌 이곳에, 아름다움과 함께, 로마의 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