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바다에서 헤엄

유럽 여행기 8

by 윤음


자유 일정 중 처음으로 근교에 나가보기로 했다. 물을 무서워하는 나지만 친퀘테레 마을의 풍경이 담긴 사진 한 장은 나를 그곳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사진에만 이끌려 나서기에는 먼 길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말이다. 친퀘테레는 피렌체 근교에 있는 바닷가 마을로, 다섯 개의 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5개의 마을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마나롤라이고, 마을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친퀘테레 패스를 따로 구매해 열차를 타야 한다. 피렌체에서 기차를 타고 2시간 반, 다시 마을까지 들어가기 위해 기차를 10여분 타는데 기차표와 패스는 기계로 구입할 수 있지만 느리고 줄이 길어서 각각의 표를 사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우왕좌왕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 줄을 서고 길을 찾는 동안 일행은 소매치기를 당할 뻔했다! 다행히 지켜보던 관광객이 발견해 도와줘서 지갑은 지켰지만 그만큼 사람도 많고 정신이 없다. 유럽에 다니는 동안 소지품 노이로제 걸려서 온 사람이 바로 나다. 한국에 오자마자 무사 귀국했다는 안도감도 있었지만, 안전하다는 느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금 실감했다.



마나롤라 기차역에 내려 마을로 들어가는 골목은 동굴처럼 되어 있는데 그 길을 천천히 걸어 비밀스러운 듯한 통로로 나오면 아주 작은 항구가 빼꼼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내리쬐는 햇빛과 반짝이는 파도, 절벽을 따라 옹기종기 모인 색색의 벽들, 바다에 풍덩풍덩 몸을 던지는 사람들.

뜨거운 태양과 파도의 악보에 기꺼이 하나의 음표가 되는 사람들. 말 그대로 눈부시다. 일행들이 쭈뼛하면서도 슬그머니 몸을 적시는 모습에 웃음이 배어 나왔다. 사진을 찍어주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던 건, 물에 몸을 담그면서 배시시 새어 나오는 천진난만함과 해방감이 느껴져서이다. 발만 살짝 담갔을 때, 뜨거운 태양 때문인지 생각보다 물이 따듯했는데 젖은 머리칼과 멀리서도 보이는 입꼬리를 보고 있자니 한결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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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에서 마나롤라로 들어가는 입구


물놀이를 즐기지 않는 터라 나는 일찍 돌아가 숙소에서 쉬고 있는 룸메 언니를 만나 피렌체를 좀 더 즐길 예정이었다. 다른 일행들은 남아서 물놀이를 더하고, 피사의 사탑을 보고 오는 일정이었다. 그렇게 혼자 돌아오는 길,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함께하며 마음을 나눈 터라 어쩐지 더 뭉클하고 생각이 났다.

이곳은 너무나 덥지만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행복하고, 찬물로 샤워하거나 시원한 물을 들이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해질 무렵은 항상 영화 같아서 감동적이고, 야경은 언제나 황홀하다고.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여행도 여행이지만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깨닫는다고. 바쁘게 다니는 와중에도 보고 싶고 생각나니 간간히 안부와 사진들 전하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일행들과 친구들, 나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역시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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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롤라, 수영하는 사람들



돌아오는 기차 역시 표를 사는 데 오래 걸려 가까스로 탔는데, 조금씩 지연이 됐다. 그러다가 한 정거장을 남기고는 아예 정차해 버렸다. 피렌체 도착시간은 18:08분이었는데 19:10이 되도록 열차는 서있었다. 10분, 20분 지연될 때는 안내 방송도 해주더니 정차가 지속되는데 아무런 안내가 없었다. 문을 열어 놓은 채 정거장에 서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도 답답했는지 하나둘 열차에서 내렸다. 나도 앞에 앉은 관광객들과 이야기하다가 한 정거장 차이니 다른 열차로 갈아타는 게 좋겠다며 열차에서 내렸다. 내려서 세 걸음 정도 떼었을까? 갑자기 열차가 문을 닫고 출발하는 게 아닌가! 이럴 수가... 허탈하게 다른 열차에 올라탔고, 그 열차가 출발하기 전까지 부정적인 생각이 어찌나 나를 삼켰는지 모른다. 이렇게 고생할 줄 알았으면 혼자 돌아오는 게 아닌데, 왜 내가 탄 열차가 이렇게 된 걸까, 수영도 안 할 건데 친퀘테레까지 가는 게 아니었나, 오늘 하루 종일 이렇게 기차에서 시간을 보내다니.. 속상하고 억울했다. 마침 배도 고프고 지쳤으니 눈물까지 찔끔 났다. 그렇게 오늘 하루 왕복 7시간을 기차에서 보낸 후에야 지상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기차에서 내려 숙소로 걷는데 꼬리에 꼬리를 물던 부정적 감정들이 거짓말처럼 빠르게 증발됐다. 고된 상황에서 내면의 소리는 너울거림이 심하다. 그리고 상황에서 벗어나면 놀랍게도 잔잔한 호수로 돌아오는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눈물까지 고일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그 당시에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구덩이에 빠진 듯한 기분인 것이다. 좋은 마음과 생각은 나를 좋은 쪽으로 이끈다. 반대는 또 한없이 나를 끌어내린다. 빛이 드는 방향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좋은 시간들을 많이 만들어줘야 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마음이 바다에서 헤엄치느라 고된 하루였다. 잠들기 전 하루 일정을 기록하며 좋았던 것들을 냉큼 나열해본다. 조식이 맛있었다. 열차 안에서 반갑고도 그리운 안부를 전했다. 아름답고 싱그러운 풍경과 마주했다. 예쁜 사진을 찍었다. 유럽의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저녁에 소소한 기념품을 샀다.


내일은 더 찬란한 여행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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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반했고, 찍은 마나롤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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