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에 빠지다

유럽 여행기 9

by 윤음


세상에 다시없을 물의 도시 베네치아.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로 이동했다. 오마주한 풍경을 많이 보기도 했고, 물이나 건물이 더럽고 노후됐다는 후문이 자자했으니 기대치는 0에 수렴했다. 그래서 였을까, 주 이동수단인 수상 버스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고, 강물은 역시나 들여다보기 꺼려질 만큼 구정물과 비슷한 색을 내고 있었으며, 건물 곳곳의 노후된 모습이 여과 없이 눈에 들어왔다. 시큰둥하게 골목을 다니다가 산마르코 성당과 광장을 마주하면서 베네치아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다. 마치 손바닥 뒤집듯이 말이다. 외벽이 공사 중이었지만 마치 알라딘에 나올 법한 성의 모습을 한 성당은 아름다웠고, 좁은 골목을 누비다 마주한 커다란 광장은 그 크기로 하여금 이 물 위의 신비한 도시의 감탄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그때부터 나는 천덕꾸러기 죽마고우에게 서서히 이성의 감정을 느끼는 여학생처럼 베네치아에 빠져들었다.


1730년부터 자리했다는 카페 플로리안. 산 마르코 광장 한가운데 위치해 잘 차려입은 웨이터와 4중주 연주 무대까지 겸비한 덕에 꽤나 비쌌지만 기분 내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한껏 사진 찍는 것으로 이런 순간을 누릴 수 있음을 곱씹고자 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의 꽤나 비싸 보이는 곳에서 여유를 부리는 모습이라니. 저마다의 빛나는 순간들만 올리기 바쁜 sns에 부러움 사기 좋아 보이는 한때를 나도 보낼 수 있었음을 말이다. 열심히 사진을 찍었지만, 올리지 않았다. 나의 평범하고 힘들었던 날들에도 빛나는 순간이 있었음을 나만 기억해도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그들의 빛나는 순간과 나의 평범한 날들을 비교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제 그만 나의 빛과 남의 빛을 비교하고 싶지 않은 소망을 담아서. 누구든 다르게 다른 시기에 빛나는 것일 뿐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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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플로리안


5명이서 80유로를 꼬깃 모아 곤돌라를 탔다. 곤돌라는 뱃사공에 따라 분위기가 좌우되기 때문에 앞선 기대는 금물이다. 먼저 배를 타고 온 일행이 곤돌라 위에서 맥주까지 마시고 사진도 찍어주었다고 너무 좋았다 말해준 것에 비해 우리가 탄 배에서는 움직이면 배가 뒤집힌다며 혼나고 눈치보기 바빴기 때문이다. 아주 조금 고개 내밀었을 뿐이었는데 미안하다며 사공을 달래기에 바빴다. 언니가 함께 단체 사진을 찍어줄 수 있냐고 묻는 것을 나머지 일행이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그럼에도 곤돌라를 타는 동안 물살에 귀를 대고 천천히 노를 젓는 소리에 마음이 안정됐다. 작은 조각배에 몸을 싣고 그 속도에 맞춰 바라보는 풍경은 저절로 여유라는 시간에 나를 앉혔다. 배가 지나가면서 골목을 들여다보면 영화에 나올 법한 앵글이 이어져 즐거웠다. 장면들을 슬쩍씩 엿보는 기분이랄까. 이 시간 동안 사진 찍기에 바쁘기만 했다면 아쉬웠을 것이다.


KakaoTalk_20221003_135404160.jpg 곤돌라 타기


다시 광장과 항구 쪽으로 돌아가 여유롭게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슴푸레하게 물들어가는 하늘과 그에 맞춰 서서히 불을 밝히는 가로등. 볼수록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고 싶은 풍경이었다. 아름다웠다. 이제 어둑해져 자리에서 일어나 광장에 들어서는데.. 황홀함이 그곳에 있었다.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에 촘촘히 들어선 조명이 우리를 빛으로 둘러쌌다. 일몰과 야경, 건축물과 광장, 저마다의 도시가 말하는 것들이 있다고 느낀다. 그들 중 같은 것은 하나 없고 모두 빠짐없이 아름다움을 품고 있지만, 오늘 눈에 담은 것들은 유독 눈부시게 기억에 남을 것이라 여겼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수상버스를 기다리는데 역시나 한참이 걸렸다. 그동안 물결치는 길 위에 뜬 달과 불빛들이 일렁거림을 보았다. 이 기다림과 불편함 사이에 낭만이 자리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느린 시간 안에 머물고 있으니 몸은 불편해도 어쩐지 마음이 편안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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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마르코 광장의 야경
KakaoTalk_20221003_135404160_06.jpg 황홀한 베네치아 야경


다음날, 하루쯤은 여유를 두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늦잠을 자고 느지막이 하루를 시작했다. 베네치아의 풍경과 유럽의 속도는 나에게 계속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동안 너무 빠르게 지내고 있었다고 말이다. 골목골목을 걸으며 기쁜 마음으로 길을 잃었다. 작은 가게에 들어가 소소한 기념품들도 사고, 작은 다리를 마주하면 이곳이 물길로 둘러싸여 있는 곳임을 인지한다. 여행에서는 잠시 헤매는 시간조차 반갑고 새로운데 왜 살면서 헤매는 시간은 낭비로만 느껴질까. 인간의 생애에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물론 그렇게 지도를 덮어두고 골목을 누비다 다리가 아파 구글맵을 켜 카페를 검색했다. 가까이 있는 젤라또 집에 갔다. 맛은 실패. 이탈리아 젤라또, 어디나 맛있는 게 아니었다는 충격. 그래서 목적지를 정하고, 일정을 짜는 게 중요한가 싶다가도 이 짧은 방황에도 의미를 찾아보는 내가 마음에 든다. 여행은 자신을 알아가기 위한, 새로운 나를 만나기 위한 시간이구나. 누군가를 만나는 일, 일상에서의 크고 작은 일들이 모두 그러하겠지만 여행은 아주 확실하고도 다면적인 방법이다.



KakaoTalk_20221008_213500056_03.jpg 베네치아의 수상버스


그렇게 조금 더 헤매다가 광장의 카페에 앉았다. 여행에 앞서 책을 한 권 챙겨야겠다고 생각해 고전을 하나 가져왔다. 적당히 얇으면서도 좋아하는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이탈리아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이 보이는 광장에서 독일계 스위스인인 헤르만 헤세의 불교적 성인의 이름을 딴 책을 읽는 한국인이라니. 인간은 얼마나 복합적인 존재인가. 책을 펼쳤지만 광장의 소음들 덕분에 자꾸만 문장에서 미끄러졌다. 문장을 곱씹으며 읽다가 소음 틈새로 익숙한 멜로디의 연주를 듣고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낀 순간, 때마침 기쁨이란 단어에 멈췄다. 아니 기쁨이란 단어에 머물다가 바람과 연주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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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마르코 광장의 카페, 여유로운 시간


숙소로 돌아갔는데 마침 일행들이 숙소 야외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합석해 오늘 보고 먹고 찍은 것들을 나누고 보니 오늘이 어느덧 여행의 ⅓이 되는 시점이었다. 여유로운 것도 좋지만 한편으로 시간의 흐름이 아쉽기도 하다. 내일은 다시 속도를 내봐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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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가는 길









베네치아의 밤


저 일렁거리는 불빛을 보기 위한 시간이었던 것처럼,

모든 시간은 저마다의 가치를 가지고 흘러가는 것이라고. 믿고 싶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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