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기 10
돌로미티는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알프스 산이다. 뜨거웠던 도시에서 벗어나 알프스 쪽으로 향하니 부쩍 시원해진 공기가 우리를 반겼다. 차로 이동하면서 보이는 푸르른 빛깔의 언덕에 한번, 그 뒤로 보이는 높다란 산맥에 또 한 번 수시로 감탄을 자아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아우론조 호수. 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경치에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천국.
도시에만 머물다 와서였을까. 땀줄기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 더위 속에 있다 와서였을까. 어떤 이유를 덧붙이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천국의 모습 그 자체였다. 사실, 천국을 제대로 꿈꿔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말로 존재할지도 모르고 갈 수 있는 곳인지도 모르는 막연한 이데아의 모습을 말이다. 하지만 생각했다. 각자가 꿈꾸고 그려보는 천국의 모습이 다르고, 죽음 이후 그 풍경에 나를 담을 수 있다면, 지금 이 모습을 꿈꾸고 그리워하겠노라고. 살면서 힘이 들고 지칠 때, 도저히 자신과 타인에게 너그러워질 수 없을 때, 도망치고 싶고 막막하기만 할 때, 언제든 이 풍경을 꺼내어 나를 돌보겠노라고 말이다. 이런 풍경 안에 나를 놓아두었고, 앞으로도 놓아둘 수 있는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절로 평안에 가까워질 것만 같다.
아우론조 호수에 머무는 시간을 길지 않았다. 알프스의 호수는 빙하 호수이기 때문에 물이 굉장히 차갑다. 생각보다도 차가워 발 담그는 순간 머리가 아찔했다. 그렇게 놀라고 웃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크게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머물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치유의 시간이었음이 분명했다.
아우론조 호수에서 다시 미주리나 호수로 가 근처 카페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멀지 않은 호수인데도 다른 빛과 색이 신비로웠다. 그런데 이번엔 호수 보다도 주변으로 펼쳐진 들판에 넋을 잃었다. 호수 옆으로 조금 걸으니 너른 들판의 넉넉한 품이 우리를 반겼다. 나는 그곳에서 뛰지 않았지만 그 풍경을 눈에 담는 나의 마음은 쉬지 않고 들판을 구르고 달리고 내질렀다. 들판을 마구 날아다닌 내 마음의 무게가 얼굴로 드러났는지 그때 사진에 담긴 내 표정은 어떤 때보다도 가볍다.
다시 차로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 산을 올랐다.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 라바레도의 세 봉우리란 뜻으로 산 중턱까지 차로 올라 방목 중인 소들을 보고, 경치를 감상하며 트래킹을 즐길 수 있다. 아찔한 높이와 찬 공기, 풀을 뜯는 소들과 딸랑거리는 목의 방울 소리, 펼쳐진 장관과 가까이서 느껴지는 태양. 오늘의 마지막 경이로움과 마주한다. 카메라를 가져다 대고 셔터를 누르기만 해도 컴퓨터 배경화면이 생성됐다. 이때 하나둘 가족들에게 영상통화를 걸기 시작했다. 이런 순간에 가족들이 떠오르고,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똑같나 보다. 유럽여행에 앞서 망설이던 밧줄 같은 질문 중의 하나는 나만 행복해도 되는가? 였다. 분명 가족들도 오고 싶었을 텐데 나 혼자 떠나 자유롭고 태평하게 누려도 되는 걸까 생각했다. 그 질문을 이전까지 꽤나 오래, 무겁게 달고 지냈던 듯하다. 무엇이든 내가 먼저 행복하고 스스로를 돌보고 나서야 이후도, 타인도 있음을 이제는 안다. 나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주변에 소홀해도 안되고, 나를 잃으면서까지 주변을 돌보는 것도 옳지 않다. 나만 행복해도 될까의 답은 내가 행복한 것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일이라는 것, 그렇게 채운 행복을 주변에 나누면 된다는 믿음으로 길을 나섰다. 그렇게 나는 천국을 엿볼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니 옷 입은 자국 그대로 살이 탔다. 산 위에서 잠시 트래킹을 했는데 햇빛이 강했던 모양이다. 공기가 시원해 뜨거운 줄 모르고 걸었다. 풍경에 빠져 아무래도 좋았던 날이다. 천국의 모습을 엿보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