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화가 치미는 순간이 있다.
며칠 전 그 날도 그랬다.
나는 딸을 목욕시키고 있었다.
샴푸를 펌핑해서 슥슥 비벼 아이의 두피에 묻혔다.
아이의 손에 비누를 쥐어주고
슥슥삭삭 노래도 같이 불렀다.
뽀득뽀득 샴푸와 비누의 흔적을 비웠다.
이제 머리만 말리면 된다. 머리만.
꿀맛같은 자유의 시간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아이는 드라이기를 들고 손짓하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따뜻한 물을 좀 더 맞겠다고 했다.
간신히 꼬드겨 수도꼭지를 잠갔더니
이번엔 욕실벽에 묻은 비누거품을 없애야 한단다.
그리곤 역적 주리 틀듯 머리카락을 쥐어짠다.
고작 세 발자국 거리가 평양 만큼 멀게 느껴진다.
아이가 벽에 붙은 날파리에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 그 순간,
이성의 전기가 끊겼다.
"엄마가 뭐라고 했어. 머리 말리자고 했지!"
아이는 드라이기로 눈물도 함께 말렸다.
입이 댓발 나온 아이를 간신히 어르고 달래 재웠다.
헐리우드 액션배우처럼 재빨리 옆으로 굴러
아이들 침대에서 빠져 나왔다.
문틈으로 보이는 희미한 빛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자유의 세계가 열릴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순간,
난 다시 한 번 뒷목이 뻐근해진다.
거실 매트가 보이지 않았다.
인형, 퍼즐, 색종이, 연필, 가방.
아이 둘의 장난감으로 뒤덮여 그 커다란 매트의 존재가 묻혔다.
남편은 그 풍경의 배경이 된 채
기다랗게 누워 리모콘만 하염없이 누르고 있었다.
"여보. 거실이 왜 이래?"
남편은 그제야 내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어디 집만 그럴까.
지난 주, 급히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팀 동료에게 업무용 메신저로 자료를 보냈다.
십분이 지나도, 이십분이 지나도 답이 없다.
안되겠다 싶어 자리로 찾아갔다.
뭔가를 엄청난 속도로 타이핑하고 있었다.
더 바쁜 업무가 있었구나 싶어 돌아서려는데-
화면에 띄워진 메신저가 노란색이었다.
한숨을 속으로 쉬며 자리에 돌아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노란색 카톡으로.
"지금 많이 바쁜가?
회사 메신저에서 답이 없어서."
그에게 노란창으로 답이 왔다. 10초 만에.
화를 내고 남는 건 대개 후회다.
순식간에 맺힌 딸의 눈물을 보며 그랬고,
끙 소리 내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남편을 보며 그랬다.
미안하다며 점 여섯 개를 찍은 동료에게도 그랬다.
딸은 따뜻한 물을 맞는 게 좋다고 했다.
동생없이 엄마를 독차지하는
목욕 시간이 너무 좋다고.
그러고 보니 아이와
단 둘이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남편은 그 날 따라 피곤했고,
잠시 누워 있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남편은 이제껏
아수라장이 된 거실을 나몰라라 한 적이 없었다.
동료는 아이 건강 문제로
친정 엄마와 카톡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 건강보다
중하고 급한 일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그 '그러고 보니'를 조금만 더 일찍 헤아렸다면
내 딸은 울지 않아도 됐을텐데.
내 남편과 동료의 마음도 다치지 않았을텐데.
이성의 끈을 놓았던 그 수많은 순간들.
하지만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은 일이 대부분이다.
때론 그럴 수 밖에 없었을 일도 있었다.
삼십 몇년을 살며 그토록 많이 화가 났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죽일 놈은 없었다.
기어이 상처를 주고 서야
'그러고 보니' 타령을 한 내가 못난 놈이었을 뿐.
얼마 전 어디선가 이 문장을 읽었다.
누군가 밉거든 이 문장을 속으로 읊어보라고.
이 말을 읊으면 거짓말처럼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될 거라고.
"그 사람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
밍기적거리는 우리 딸,
엄마와의 시간을 기다리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소파에 가로누웠던 내 남편,
직장인으로서, 아빠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메신저에서 말이 없던 내 동료,
아이의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제-
참을 인자 세 번 대신
이 문장 세 번이다.
"이 사람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