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기의 커피 모델 38년>
아나운서의 말_진한 커피향 같았던 배우 안성기를 기억하며진한 커피향 같았던 배우 안성기를 기억하며
한국인의 커피 사랑은 유별나다.
일터에서는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고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카페에서 이루어진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심지어 공부도, 업무도 카페에서 커피와 함께 하는 경우가 많으니 한국인에게 커피는 기호식품을 넘어 생활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2020년 기준 한국인의 1인당 연간커피 소비량은 367잔, 세계 2위였고 2023년에는 405잔으로 늘었다. 하지만 프랑스에 이어 여전히 세계 2위이다.)
구한말 커피를 즐겼다던 고종은 후손들의 나라가 커피 공화국이 되리라 짐작이나 했을지.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 우며, 천사처럼 순수하고, 사랑처럼 달콤한 (by파루삭) 커피는 어떻게 커피콩 한 알 나지 않는 한국인들을 홀렸을까.
우리나라에 커피가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건 한국 전쟁 이후 주둔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인스턴트 커피였는데 간편하고 빠르게 마실 수 있는 특성이 한국인의 성정과 잘 맞아떨어졌는지 경제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고 1970년대에는 동서식품에서 커피와 프림 설탕을 배합한 커피믹스를 개발하면서 커피 공화국의 탄생을 알리기 시작한다.
커피2스푼 프림2스푼 설탕2스푼, 일명 다방커피 레시피로 알려진 황금비율(실제 제조사의 권장 비율은 1:2:1.4이다)에 빠진 한국인들의 집과 직장에는 인스턴트커피 병이 진열되어 있기 마련이었고 명절 선물로 빠지지 않던 품목이 바로 동서식품의 맥심 커피 선물 세트였다.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동서식품은 인스턴트커피 시장을 키우기 위해 기술개발과 함께 광고를 통해 고객의 충성도를 높여나가는 전략을 펼쳤는데 사람들이 갖고 있는 커피의 이미지를 십분 활용한 광고 전략은 이후 우리나라 커피 업계의 모델이 되었다.
커피 업계는 한번 내세운 모델을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
대신 오랫동안 함께 할 호감 가는 모델을 찾기 위해 공을 들인다.
커피라는 기호식품의 특성 자체가 일상을 함께 하며 좀 더 풍요롭고 여유 있는 삶을 만들어 준다는 이미지가 있기에 굳이 유행에 민감할 필요가 없고, 꾸준히 함께하는 모델이 제품을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하면 그 이상의 광고 효과가 없기에 장수모델이 꾸준히 나오는 편이다.
맥심 대표 브랜드 중 하나인 <맥심 모카골드>는 출시 때인 2000년부터 배우 이나영을 내세워 24년 동안 모델을 맡겼다. 서민적 인스턴트커피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도회적이고 세련되며 고급화된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출시했던 모카 골드에 이나영이란 배우는 그 기대를 충족하며 이나영=맥심 모카 골드로 소비자에게 각인되었다.
지금은 이나영의 배우자인 원빈도 2008년 <T.O.P> 출시 때부터 16년을 광고모델로 활동했는데 2024년 원빈의 <T.O.P> 광고 하차 소식이 알려지면서 누가 뒤를 이을 것인지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맥심 화이트 골드>는 2012년 제품의 출시와 함께 피겨 여왕 김연아를 광고모델로 발탁해 단 한 번의 광고모델 교체 없이 <맥심 화이트 골드>=<연아 커피>로 인식을 시켰고,
원두커피가 대세가 되기 시작하며 프림과 설탕을 걷어낸 프리미엄 이미지의 <카누>는 <커피 프린스1호점>으로 인기를 얻은 공유를 2011년부터 광고 모델로 내세워 지금까지도 연을 이어가고 있다.
연예인이라면 누구나 커피 광고에 출연하고 싶어 한다.
도시적이면서도 따뜻하고, 편안하면서도 친숙한 이미지를 추구하는 커피 광고는 한번 시작하면 장수모델이 될 수 있고 모델의 이미지 구축에도 유리하기 때문이지만 그만큼 모델이 되기도 어렵 기에 소비자들의 기억에 더 남을 수밖에 없다.
사실 오늘은 며칠 전 작고한 안성기 배우를 기억하기 위해 길고 긴 커피 광고 이야기부터 꺼냈다.
위에 열거한 모델들도 오랜 시간 커피 광고에 출연했고, 또 하고 있지만 안성기 배우는 무려 38년의 세월을 맥심의 모델로 활동했다.
커피 모델은 도시적이면서도 따뜻하고 편안하면서 친숙한 이미지를 추구한다.
1983년 맥심의 모델이 된 안성기는 이 모든 조건을 갖춘 인물이었고 고인도 생전 커피 광고에 많은 애정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진다.
아역부터 시작해 70년 가까운 시절을 배우로 활동하며, 그 흔한 스캔들 한번 없었던 국민배우. 후배들에겐 귀감 이었고 가족에게 따뜻한 가장이었으며 무엇보다 아내에게 충실했던 현실의 안성기는 브라운관 속에서도 자상한 남편으로, 멋진 직장동료의 모습으로 잔잔한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38년의 시간 동안 여유 있는 커피 한잔을 권했다.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는 명 카피도 그의 따뜻함이 담긴 목소리를 통해 완성되었는데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커피에,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호감이었던 안성기 만한 모델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따뜻한 커피 향만큼이나 아름다웠던 그 미소를 다시 볼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리고 유독 아름다운 어른의 향기를 풍겼던 이들이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는 안타까운 겨울이 지나고 있다.
<전지적 시점>
테라피스트의 말_커피 한 잔에 남은 좋은 어른의 온기
아나운서님의 글을 읽으며 긴 커피 광고의 시간을 지나오다 보니 어느새 훌쩍 흘러버린 세월이 새삼 빠르고 무자비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시간, 저는 세월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커피 한 잔에 얽힌 추억들을 떠올려 봅니다.
한번은 그림책테라피 수업에서 한 분이 커피에 얽힌 추억을 들려주신 적이 있어요.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대학교 1학년 신입생 시절 학교 선배가 “우리 비엔나 커피 한 잔 하자”고 말했었는데 그때는 비엔나 커피가 무엇인지도, 그런 커피가 있는지도 몰랐던 때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따라간 카페에서 포슬포슬 올라간 새하얀 거품과 계피 가루의 향에 취해 호로록 호로록 마셨다며 옛 추억을 나눠주셨어요.
그날 이후 지금까지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카푸치노만 보면 그 선배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고 합니다.
이처럼 누구나 가슴 한켠, 커피와 함께 남아 있는 다정한 기억 하나쯤 품고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요.
저에게 커피는 살다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때, 잠시 쉬고 싶을 때, 보고 싶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누군가와 마음을 포개며 몸과 마음을 녹이는 다정한 한 잔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말이자 당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호감의 말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우리, 커피 한 잔 할래요?”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월이 참 많이 흘러 이제는 커피를 마시는 방식도, 커피를 둘러싼 풍경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커피가 남긴 기억의 온도 만큼은 쉽게 식지 않는 듯 해요.
저 역시 아나운서님의 글을 따라 자연스럽게 커피 광고 모델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봅니다. 고 안성기 배우의 맥심부터 이나영의 맥심 모카골드, 원빈의 TOP, 김연아의 화이트골드, 공유의 카누까지...
특히 38년 동안 같은 커피 브랜드의 얼굴로 남아 있었던 고 안성기 배우님은 ‘광고 모델’이라는 말로는 다 담기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커피를 팔기보다 커피가 놓일 자리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었고, 여유를 연기하지 않았으며 따뜻함을 과시하지도 않는 ‘온아한 사람’이었어요.
그저 커피 한 잔 내밀며 “잠깐 쉬어가도 괜찮다”라고 말없이 의자를 빼 줄 것만 같은 사람.
그래서 저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림책 《모카》를 떠올립니다.
몸과 마음이 몹시 지친 주인공 앞에 작고 하얀 모카 토끼가 나타나 아무 설명도, 어떤 조언도 없이 커피를 내려주는 이야기에요.
주인공이 참았던 화를 쏟아내고 끝내 울음을 터뜨려도 모카 토끼는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괜찮다고, 울어도 좋다고, 난 늘 네 곁에 있다고 말하며 원하는 커피를 골라보라고 말할 뿐이죠. 두 잔, 세 잔이어도 좋고, 전부여도 괜찮으니 마음껏 골라보라고 말이에요.
그림책 속 커피 메뉴판에는 우리가 살면서 참 듣고 싶었던 말들이 커피의 이름을 빌려 적혀 있습니다. 카푸치노 한 잔에는 “우선은 크게 심호흡을” 에스프레소 한 잔에는 “싫은 일은 모두 잊어”, 비엔나 커피 한 잔에는 “그래그래, 맘 편하게 하자!”
어쩌면 우리가 일상의 고단함을 안고 커피 한 잔 앞에 앉았을 때 진짜 바랐던 건, 커피 한 모금이 아니라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 다정한 문장들이 아니었을까요.
저는 과연 누군가에게 이런 숨 고를 곳이 되어준 적이 있었는지, 혹은 이런 다정한 위로를 건네받은 기억이 언제였는지 문득 멈춰 서서 되돌아보게 됩니다.
안성기 배우가 무려38년이라는 오랜 시간 커피 광고 속에서 보여주었던 모습도 어쩌면 그림책 속 흰토끼 ‘모카’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세상을 향해 앞서 나가기보다 그저 늘 같은 자리에 오래도록 머물며 커피 한 잔과 함께 곁을 지켜준 사람이지 않을까요. 이제는 그의 미소를 직접 볼 수 없지만, 커피 한 잔에 담긴 그 다정한 온기만큼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오늘도 참 잘 버텼다"고 말을 건네는 것만 같습니다.
오늘도 고 안성기 배우님의 미담이 굴비 엮듯 이어지는 기사를 마주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저런 모습으로 나이 들어가고 싶다'고 우러러볼 수 있는 '좋은 어른'을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흔치 않기에, 그의 빈자리가 남긴 온기는 더욱 마음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사람은 태어나 먹고 자며, 사랑하고 다투고, 때로는 처절하게 화해하며 늙어갑니다. 그렇게 살아낸 시간은 죽음에 닿는 그날까지 각자의 이야기로 숨 쉬며 남기에, 인생은 결국 '나라는 한 권의 책'을 지어가는 과정이라는 말이 깊이 와닿습니다. 세월의 무자비함을 견뎌낸 한 사람의 생생한 진심은 사라지지 않고 결국 이야기로 살아남아 다음 사람의 삶에 조용히 가닿을 테니까요.
그러고 보니 아직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다만 온기를 나누는 법과 온기를 느끼는 법을 잊고 지냈을 뿐...
그래서 저 역시 그동안 마음의 빗장을 반쯤 걸어 잠그고 바라보았던 세상과 사람들을 이제는 조금 더 믿어보려 합니다.
그리고 제가 머무는 자리에서 소소한 아름다움을 지키며 제 곁을 오가는 이들에게 말간 기운을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연기에 대한 정의이기 이전에 그가 평생 삶을 대했던 태도가 그대로 고스란히 묻어난 안성기 배우의 말씀을 떠올리며 이 글을 맺습니다
“좋은 배우가 되기 이전에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는 연기는 가짜일 뿐입니다.”
그가 남긴 이 '예의'라는 단어가 유독 따뜻하게 다가오는 겨울.
향기로운 어른으로 살다 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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