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청와대 뒷길.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가고 싶은 시간대가 있어?"
"글쎄, 딱히. 뭐 고르자면 그냥 어릴 때로 갈까? 아니 한 고등학생 즈음으로?"
"왜 그때로? 그럼 지금까지 살았던 걸 다시 살아야 하는데?"
"그냥, 어리고 젊었던 때니까.”
“그때로 가면 뭐가 달라질 것 같아?”
“그러게 다시 돌아가도 지금이랑 똑같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네. 너는?"
"나는, 있어."
"언제?"
"나는 한 3시간 전, 나 퇴근할 때. 너랑 와인 바 가던 그 길, 그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데."
"뭐야,"
어느 금요일 저녁 이런 대화가 오갔던 것 같다. 나는 저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이틑날 아침, 나는 따뜻한 차를 한 잔 내리고 쓰기 시작한다. 나는 시간에 대한 내 새로운 감각을, 특정 시간을 되풀이하고 싶다는 내 낯선 욕망을 흥미롭게 바라본다.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은가? 한 단위의 시간을 반복하고 싶은가? 그 시간에 다시 새롭게 들어갈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특정 루프에 갇히고 싶은가?
어떤 이와 그저 함께 있음. 말과 말이, 살과 살이 맞닿아 있음. 함께 있는 지금의 편안함, 따뜻함, 좋음. 과거도 미래도 없는 그저 파편화된 한 조각, 에피소드로서의 현재를 무한히 반복하고 싶은가?
내 삶의 영원 회귀를 긍정하면서도 그것이 운명의 무게와 고통을 감내하려는, 태도의 전환을 통해 매 순간 실존하려는 단단한 의지가 아니라, 그 마디의 반복을 원하기 때문에 기꺼이 다소 간절하게 그 반복을 상상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점이 나에겐 낯설다. 좋은 음악을 다시 또 다시 재생시키고 싶은 것처럼, 다시 들음으로써 그 음악적인 시간에 빠져들고 더 섬세하게 감응하고 싶은 것처럼, 나는 이 금 토 일의 시간 속에 다시 입장하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내 시간들은 언제나 전체 서사의 한 마디로써, 그 이야기에서 담당거나 혹은 훗날 담당했다고 회고적으로 위치 지우게 될 역할에 의해 이해되고 수긍되고 욕망되었는데, S와의 에피소드들은 우선적으로 그 자체이다. 그 자체의 소리이고 공기이고 향기이다. 그저 그 자체의 감촉이다. 나는 껴안고 뒹굴고 그와 옆 선을 맞댄다. 나는 그저 '지금' 그와 '함께' 있다. 현재는 쌓이지 않고 아이스크림처럼, 와인처럼, 달콤하게 부유한다. 혀 끝으로, 코 끝으로 느끼는 시간, 피부에 닿는 햇살 같은, 날씨 같은 찰나들, 어떤 음악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
그런데 금욕적인 시간 관리인인 '나'는 이 현혹적인 거품이 언짢다. 나는 어떤 '목표'와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위한 가시적이고 인식가능하고 축적되는 실천들 대신 달콤하고 몽롱한 (혹은 달콤하고 몽롱하다고 썼지만 그것이 달콤함이나 몽롱함인지 파악도 잘 안 되는) 안개들로, 오랜 꿈 같은 시간들로 주말을 보내버렸다. 보아라 시간은 갔는데 너는 무엇을 만들어냈느냐, 하면서 말이다. 이 관리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이 관계는 미래를 기약하는가? 정동의 축적이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축적이 되는가? 그러면 나는 꿈에서 깬 듯 뻣뻣해져서 내 시간의 리본을 고쳐 매야겠다고 생각한다.
글쎄, 인식과 판단의 세계, 축적의 세계, 선형적 내러티브의 세계에서 살던 나에게 직시할 수 없고 모호한 감각들, 쌓이기보다는 흘러가버리는 것들, 점적이고 현재적인 시간들이 낯설고, 그래서 조금 두려운 것 일수도 있다. 일단은 그저 그런 것.
이를 받아들이고, 한편으로는 내 소중한 관리인의 욕망에도 같이 귀 기울이자. 시간의 몸통, 그 결을 어르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 방법들을 찾아보자. 각 시간은 각기 다른 형식과 내용으로 의미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