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도그림 Sep 12. 2023

로맨스의 이름들

연애, 썸, relationship, situationship ...

오늘 문득 연애 관계를 지칭하는 다양한 이름에 대해 생각했다. 특히 미국과 한국에서 로맨틱한 관계를 부르는 여러 단어들의 차이에 대해서 말이다.


이 주제에 대해 갑자기 생각하게 된 것은 최근에 한 이런 대화 때문일지도...


"언니한테 들었는데, 미국 사람들은 연애에도 세 단계가 있다면서?"

"어떤 단계인데?"

"첫번째 단계는 두 사람이 데이트는 하는데 이 관계가 뭔지 정의는 안 한 상태인거야. 그냥 캐쥬얼하게 만나는거지."

"음, 그래."

"두번쨰는 독점적인 (exclusive) 관계이고 마지막은 사귀는 관계 (being in a relationship) 인거야."  

"오,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다."

"맞는 것 같아?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연애해?"

"음, 그러니까 독점적인 건 두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아닌데 '연애'라고 부를만큼 서로한테 헌신하는 상태는 아닌거고, 그 다음 단계인 사귀는 건 커플이 서로의 삶에 더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거고. 그런 거 아닐까?"

"응 맞아 그런 것 같아."


그렇게 대화가 이어지고...


.

.

.



1단계는 가볍게 만나는 데이트, 그 다음은 서로 사귀는 건 아니지만 다른 이성(혹은 동성)은 만나지 않기로 한 '배타적인 독점'의 관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귄다고 말할 수 있는 관계. 어떤 회색 지대에 이름을 붙이는 유형화인 것 같다. 한국 문화에서는 서로 로맨틱한 호감을 느끼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단계인 '썸'과, 그 이후 서로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을 가지고 서로의 일상에 깊게 침투하는 '사귐'의 단계 둘로 나눌텐데 말이다.  


다른 데이트 용어로 'situationship'이라는 개념도 눈에 띈다. 이는 'exclusive'와는 비슷한 듯 다른데, 사귀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situationship의 경우는 서로에 대한 배타적인 독점권도 정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르다.


사전적인 정의를 보자면, situationship이란 "공식적이지 않은 연애 관계 혹은 성적인 관계 [a romantic or sexual relationship that is not considered to be formal or established.]"이다. 이는 상황(situation)과 관계(relationship)가 합쳐진 단어로, 상황에 따라 만남이 이루어질 뿐 서로 어떤 사이인지 정의하지 않은 상태라는 뜻이다. 이는 종종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되며, 로맨틱한 만남의 이점만을 누리려고 할 뿐 관계에 헌신하려고 하지는 않는 상대와 그런 상황을 짚어내기 위해 고안된 단어라고도 할 수 있다.


소셜 미디어를 보다 보면 "situationship의 여섯 가지 신호 (여기에 해당한다면 당신의 관계도 situationship일 수 있다!)" 와 같은 제목의 글들이 돌아다닌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혹 진단해보고 싶을지 모르니 내용을 정리해 올린다.


1.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정의하지 않는다.

2. 둘의 미래에 대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3. 상대가 다른 사람도 만나고 있다.

4. 상대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당신을 소개해주지 않는다.

5. 상대의 태도가 일관성 없다.

6. 상대에게 감정적으로 의지할 수 없다. 당신이 겪고 있는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How to get out of a situationship" 같은 제목의 동영상이나 팟캐스트랄지, "The benefits of situationships" 이라는 반어적인 제목의 릴스도 많이 돌아다닌다. 두 사람이 어느 정도 합의를 했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의 감정이 더 커질 경우에는 situationship이 잘 성립하지 않을 수 있겠고 혹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으로 관계에 임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 주의의 글들이 올라오는 것일지 모른다. 아니면 당신은 계륵일 뿐, 어장 속의 한낱 물고기일 뿐임을 깨달으라는 차원에서 하는 이야기일수도.


그럼에도 개인주의적인 문화에서 서로 필요에 따라 껐다 켜는 관계들이 더 확대되는 것 같다. 이러한 신조어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이 같은 관계를 맺어나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는 거겠지?


이 참에 현대인의 '사랑'을 분석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 <리퀴드 러브> 를 인용해보고자 한다. 재미있는 대목이 많은 책이지만 그 중 사랑에 임하는 현대인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을 가져왔다. 이 책의 서문에서 바우먼은 정서적 교류 상황에서 현대인의 두 부딪히는 욕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욕구란 "유대를 긴밀하게 하려는 동시에 느슨하게 유지하려는 상충적인 욕구"이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개인에게 모든 권한과 책임이 주어진 현 사회에서 취약함을 느끼기에 관계를 맺으려 하지만 동시에 관계 맺어진 상태에 부담감을 느낀다.


우리는 "각자가 자기 능력대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지는 것에 절망하고, 쉽게 내팽겨쳐질 수 있다고 느끼며, 함께함의 안전함과 어려운 순간에 의지할 수 있는 도움의 손길을 갈구하며, 그리하여 필사적으로 '관계를 맺으려'" 애쓴다. 그러면서도 "'관계 맺어진 상태', 특히 영원한 관계는 두말할 것 없고 오래가는 관계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그러한 상태가 부담을 주고, 참을 수 있다고 느끼지도 또 그렇게 하려고도 하지 않는 긴장을 초래하고, 그리하여 관계를 맺으려면 자유가 심하게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맺어져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독립성을 추구하는 두 상충하는 마음이 'exclusive' 나 'situationship'같은 관계의 항목을 만든 것 아닐까. 이러한 관계의 양상이 앞으로 점차 확대되지 않을까.

 

그래도 '썸'이 어쩌면 더 산뜻하고 로맨틱한지도 모르겠다. '썸', 그 다음에는 '사귐'?






_

표지: 구성연, 사탕시리즈, R.01+02, 2013, 라이트젯 C 프린트, 각 60x120cm, ed.4-5


.


매거진의 이전글 요즘의 느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