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짐, 비교, 기분 좋음, 그리고 몇몇 그림과 사진에 대하여
간헐적으로 계속 쓰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쯤 짧은 글 하나 정도 비밀 블로그에 올린다. 일상과 관계에 대한 글, 미래에 대한 상념, 관심이 가는 작가의 작품 묘사, 어느 이미지에서 출발한 환상적인 이야기의 첫 장면, 우연히 읽게 된 텍스트에서 비롯된 생각 한 도막, 등등. 하지만 각각의 글들에서 다루는 주제나 화두는 그 곳에서 뿐, 다른 것으로 채 확장되지는 않는다. 누구에게 보여주기에는 미완성인 사적인 말들. 습작이라기보다는 메모에 가까운 그것들은 그대로 두고, 오늘은 요즈음의 느낌에 대해 써지는 대로 타자를 처보려 한다.
나의 생활이 문장이 된다면?
최욱경의 그림에서...
정희승의 장미 사진에서...
(라고 쓰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이어서 이야기하겠다)
가장 먼저 쓰게 되는 건 왜인지,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사람이 등장하는 문장들을 읽다가 막 이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겠지.
이제 더 이상 만나지 않을 사람이 잠결에 어렴풋이 떠오른다. 혹은 꿈에서 어떤 진득하고 섬찍한 이야기 속 얼굴로 등장해 그리움이나 반가움, 슬픔을 불러온다. 너무 먼 시간이 되어 버린 듯한데 글이나 사진 속에는 그 사람의 흔적이 있다. 나는 새삼 낯설어한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잊혀지는구나, 혹은 가리어지는구나.
있었다가 사라져버렸던 것들.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채로 갑자기 뚝 단절되어버린 관계들에 대해 생각한다. 예컨대 얼마 전 허겁지겁 내리다가 ktx 에 두고 온 머리핀이랄지. 승강장에 발을 디디면서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늦어서 그저 의자 앞주머니에 담긴 채 멀어져갈 핀에 대해 생각만 할 뿐이었다. 승무원이나 어느 승객이 발견하고는 머리핀은 이제 쓰이거나 버려질 터인데, 역을 나오는 내내 그 장면들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혹은 어떤 손쓸 수 없는 상황이나 다툼들에 의해 내 삶에서 그 물리적인 존재가 없어져 버린 사람들도 있지. 그들이 남기고 간 구멍과 그 속으로 문득 배어들어오는 기억, 그들이 있었던 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워야 할 떄의 막연함, 안정적인 지반이 갈라질 때의 혼란, 불안함, 그 자장 안에서 오히려 그들의 존재감이 더 선명해지곤 했다. 비로소 나에게 그들이 어떤 의미였는지 몽롱하게나마 인식하기 시작한다고 할까.
* 이 지점에서 정희승 작가의 장미 사진 <무제>(2017)에 대해 썼던 짧은 글을 첨부하고자 한다. 이 사진 앞에서 앞선 감정들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희승의 이미지가 방금의 내용과 공명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경험이 일기일 때, 이미지일 때, 비평일 때 어떻게 달리 표현되는지를 볼 수 있으리라고도 기대한다. 이어지는 단락은 이 시기 즈음 하이트컬렉션에서 열린 전시 <이미지들>(The Images 2023.7.7-9.17)에서 마주한 한 사진에 대한 해석이다.
정희승의 사진은 감각과 사유 사이에서, 질문이 어떻게 이미지화되는지, 또 이미지를 봄으로써 어떻게 다시 질문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정희승이 사진에서 줄곧 제기하는 질문 중 하나는 부재, 없음, 사라짐이라는 상태가 인간의 인식과 감정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정희승의 장미 사진을 보자. 작가는 2016년 여러 상태의 장미를 촬영한 연작 <Rose is a rose is a rose> 를 선보인 바 있는데, 오늘 이야기할 장미는 이 작품들에서 파생된 또 다른 이미지, 바로 장미 없는 장미 사진이다.
정희승의 <무제>(2017)는 이전 장미 사진에서 장미의 형상을 오려낸 뒤 남은 종이를 촬영한 사진이다. 장미가 오려나가진 종이에서 감상자의 시선은 그 남아 있는 종이 자체보다는 우선적으로 잘라져 사라진 공간, 장미의 그 빈 형상을 향한다. 감상자의 시선은 그 가위질의 윤곽을 더듬는데, 보이지 않는 장미는 부재함으로써 오히려 더 그 색채와 형상을 상상하게끔 만든다. 어떤 장미였을까? 얼마나 싱그럽고 아름다웠을까? 잘려 말려 들어간 종이의 끝 부분에서는 손을 베일 것 같은 장미 가시의 촉감이 느껴지는데, 장미와 그 가시가 인쇄되어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뾰족하게 다가온다.
[ 없음을 우리는 어떻게 느끼는가? 부재한다는 것은 대상을 인식하는데 어떻게 작용하는가? ]
베어나가진 장미 사진 앞에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물음이 떠오르고 이미지로부터 비롯된 연상을 거듭하며 감상자 스스로 답변에 도달하게 된다.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더 그 존재를 더 명확하게 감각하게 된다는, 아름다운 것을 상실한 서늘함 속에서의 의식의 독특한 작동을 정희승은 장미의 붉고 날카로운 이미지를 오려냄으로써 시적으로 보여준다.
(이 그룹 전시에서 만난 여러 회화, 영상, 사진들에 대한 비평을 구상하고 있다. 작가들이 이미지를 왜 만드는지, 감상자들은 그 이미지들과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감각의 생성'과 '이미지를 통한 사고'라는 두 축으로 분류해보려는 시도이다. 문득 끼적이다가 발전시킬 수 있겠다 싶어 한켠에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진행될지 지켜볼 일이다. 조만간 하이트컬렉션에 다시 방문할 것 같은데. 그때는 어떤 작품이 눈에 더 들어올지도 또 지켜보고 기대할 일)
나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이 다른 이들에게로 향하는 요즈음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시간들을 어떻게 보냈고 어디를 향했고 그래서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그렇게 형성된 그들의 시선, 자아와 그 연출 방식, 취향, 관심사, 화제거리, 자신의 삶을 나레이션 하는 방식, 정서의 진폭 등을 흥미롭게 듣는다. 나와 접점이 닿는 대화의 순간들이나 그들이 올리는 이미지, 문구들에서 그 삶의 동력과 바람, 일상의 시간을 보내고 난 뒤 마음에 남는 잔여물 같은 것을 상상해본다. 물론 깊은 지점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어떻게 보면 비교라고도 할 수 있겠다. 비교하다보면 나의 특수성이 선명해진다. 나에게 있는 것들, 없는 것들, 내가 흘러들어온 경로, 나의 욕망, 바람, 두려움, 필요, 내 감정의 작동 방식… 그리고 너의…
좋고 나쁨, 높고 낮음의 판단을 내리지 않은 채로 삶의 모양들을 바라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한다. 관찰자로써 관조적일 때 한층 자유롭고 재미있다. 나 조차도 관찰해보고, 삶이라는 더 큰 틀, 생명 현상이라는 더 넓은 범위에서 생각하면 이 모든 게 그저 흥미롭고 마음이 가벼워진다고나 할까. 이 태도는 삶의 유용한 기술일 수도 있겠다. 물론 내 삶에서 나는 주요 순간마다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기에 언제나 우선적으로 행위자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기에 나의 감정, 욕망, 이해관계와 구분되게 온전히 관조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관찰하는 태도와 행위하는 현실 둘은 공존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큰 정서적 잔여물 없이 바삐 앞으로만 나아가는 삶도 꽤나 많고 이 또한 괜찮으리라 생각한다. 내 일주일의 절반 즈음도 그런 ‘생산적인’ 시간들로 채워진다. 나는 일을 하고 무언가를 읽고 보고 기록한다. 몸을 단련하고 마음을 비운다.
느낌과 감정보다는 행동과 이성이 더 몸집을 키워갈때면, 미국 자기계발서처럼, 유리알처럼 투명해지는 생활과 앞으로 나아가는 감각을 즐긴다. 하루를 계획하고 이를 실행한다. 잠을 잘 자고 일어나 직장을 가고,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고 퇴근한다. 추가적인 프로젝트들을 조금씩 진척시킨다. 회사 사람들과 웃으며 잡담을 한다. 새로운 사람들과 연락을 한다. 운동을 계획하고, 기구를 밀고 당기며 자극 부위를 느낀다. 근육의 움직임과 숨의 흐름에 집중한다.
비워진 조용한 일상. 저절로 잠이 드는 일상.
충분하지는 않다. 무언가는 없다. 아직 전혀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족하지만 변화하고 있다. 그 변위의 감각, 하루하루의 걸음이 이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느낌, 무언가 하는 중에만 느낄 수 있는 재미가 다시금 동력이 된다.
끝맺음을 대신한 몇 가지 그림과 문구들.
7월에 국제갤러리에서 열렸던 Bulgari Serpenti 75 years of Infinite Tale 전시에 걸린 최욱경의 회화 작업이다. 한국 초대 여성 추상화가로 알려진 최욱경은 큰 캔버스에 호방한 색채로 거침없는 붓질을 한 추상화로 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소품이나 드로잉에는 구상과 추상 사이에서 자신의 고민과 경험을 이미지화 한 내밀한 작업들이 많다. 사랑에 대한 주제랄지, 정체성에 대한 것이랄지, 당시의 사회문화적 이슈들을 콜라주한 작업이랄지 말이다.
이번 전시에서 대표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것은 <1974년도의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인데, 1975년에 그려진 작품으로 한 해 전 자신의 삶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부드러운 하늘색 배경 위 비죽비죽한 네모들로 표현한 작업이다. 당시 작업실에 있었을 아크릴 물감들 뿐만 아니라 은박지 등이 콜라주되어 그 사각을 이루었다. 한 시절의 고민들은 조금만 거리를 두고 보면 이런 작고 유기체적인 네모들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저 그렇게, 다소 미적으로, 놓고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희승의 2016년 작품 제목을 다시 보자면...
Rose is a rose is a rose (장미는 장미가 장미인 것)
단어를 바꾸어보면
Life is a life is a life (삶은 삶이 삶인 것)
Man is a man is a man
Time is a time is a 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