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글이 삶과 함께 갈 수 있는가
오전에 충분히 자지 않은 채로 일어나 활동을 했다. 베이컨에그 프렌치토스트를 픽업하러 아침에 카페에 다녀왔고, 집에서 morning bach라는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밀려오는 몽상들 속에서 빵의 달콤함, 삶은 계란의 쿰쿰함과 꾸덕함, 사과의 새콤한 물기, 아삭한 과육, 손에 묻어나는 진득하고 달콤한 촉촉함 같은 것을 느껴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마음은 내 앞의 토스트와 과일, 커피에 머물기 보다는 금방 흐리멍텅한 사념들로 흩어진다. 예컨대 창작과 삶에 대한 것. 창작이 내가 살아가는 것을 가로막지도, 생활이 나의 글쓰기를 방해하지도 않은 채로, 그저 살면서 쓰고 싶다. 삶과 함께 쓰고 싶다, 하는 생각. 더 나은 예술적 창작을 해야한다는 의무감이나 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불안하게 하는 강박에 휩쓸려 현재의 시간과 우연에 감사하지 못한 채 마냥 초조하지 않기를. 내가 내 글을 전부 계획하고 통제하려고 하기보다, 나의 삶, 직업인, 사회인, 생활인으로서의 경험과 이 틀 속에서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도 더불어 글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열어 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월요일부터 금요일 아홉시부터 여섯시까지 사무실로 출근을 하는 규칙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다. 21세기 한국의 경제 활동인으로서 나는 사회적, 경제적, 직업적 장에 참여하고, 나를 드러내고, 상호작용하며 이 질서 안에서 변모해가고 있다. 매일 반복적이면서도 다른 수행의 시간이다. 이러한 반복적인 리듬은 지금의 내가 속한 조건이다. 글쓰기의 면에서는 한계이자 가능성이다. 예컨대 어떤 순간적인 영감에 불타올라 단번의 몰입으로 글을 써내려가는 것은 지금의 내 창작 방식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창 글쓰기에 젖어서 글이 흐르는대로 내 몸도, 사고도 물 속인양 부드럽게 유영하다가도 출근할 시간이 되거나, 사내 메신저가 울리거나 하여 나는 곧바로 현실 세계로 돌아와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몰입하기보다는 여러 스크린으로 분산되어서 내 정신도, 내 사유도, 내 글도 단일한 목소리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어제도, 오늘도 나는 글을 쓰는 메모장, 업무 이메일, 업무 메신저, 사적인 연락, 갑작스러운 호출, 읽고 있는 자료, 업무 상 읽게 된 자료 모두를 종결없이 오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 글을 일필휘지의 문인화보다는 시간을 짬내서 물감을 바르고, 마르기 기다리고, 덧발라 형태를 만드는 유화와 같은 것이 될지도 모른다. 이것들은 내 한계일까? 이보다는, 그저 내가 처한, 지금으로서는 불가피한 조건일 뿐이다.
한편 직장인으로서 지금 나의 리듬은 내게 다른 가능성, 정서, 감수성을 열어준다. 이 계약관계의 힘은 들쭉날쭉한 나의 생활을 안정화 시켜주어서, 나는 이제 어떻게 해서든 9시면 사무실에 오고 6시면 대체로 집에 가고, 이를 위해 비슷한 시간에 자고, 비슷한 시간에 일어난다. 매일 출퇴근길에 산책하는 시간이 있고, 일주일에 두 번 요가원에 간다. 역동과 새로움, 자연스러움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이런 일과는 시계 시간이라는 그리드에 갇힌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반복일 수도 있겠지만 (예컨대 근대적 삶과 노동이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모습을 환상적으로 그린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리는 벌레로 변하기 전 매일 기상-출근-퇴근-수면의 일과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건 생각하기 나름이다. 이 그리드는 생각보다 억압적이지 않다. 직장생활은 꽤나 인간적이며 노동은 완전히 나를 소외시키지는 않는다. 글쓰기에 대한 의지만큼이나 나에게는 실제 세계, 이 사회적 장에서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싶다는 바람도 있으며 이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힘있고 풍요롭게 하니까. 일을 하면서도 느끼고 생각할 공간은 있으니까.
원하는 밀도로 몰입할 수 없더라도 지금 내 조건 속에서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른 태도로 내 일과에 접근할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나를 둘러싼 조건들, 공간들, 장치들을 달리 활용할 수 있다. 시간에 한해 말하자면, 나는 직장인으로서의 반복에 글쓰기라는 나만의 반복을 더할 수 있고 나는 그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듯, 정해진 시간에 쓸 수 있다. 무엇이 쓰이는 지에 지나치게 집착하려 하지 않으면서 내 삶이 가능케 할 글을 기다리며 그저 쓰는 것이다. 이 시간과 이 쓰기가 무엇을 만들어낼지 스스로도 궁금해하면서 그 과정에 몸을 싣기.
아니 에르노의 다음과 같은 말처럼, 지금 내 삶이 나에게 유일무이하고 특별한 글의 형식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고,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의 전환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삶이 글의 '소재'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글을 위한 '미지의 기획'을 원한다.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라는 이 생각은 형식조차도 실제 내 삶에 의해 부여된 텍스트를 의미한다. 나는 우리가 쓰고 있는 이 글을 절대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삶으로부터 나왔다.”
이전과는 다른 리듬, 주의력, 시선, 감수성은 어떠한 형식의 글로 거듭날 것인가? 내가 속한 조건들을 거부하기보다는 이를 끌어안고 이 안에서 가능성을 보고 행동으로서 실현하고 싶다. 누군가가 "영화 속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영화를 위한 영화에 자기를 가두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영화와 함께 다시 한 번 새롭게 살아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느끼게 된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도 글과 함께, 문학, 비평, 철학의 언어들과 함께 다시 한 번 새롭게 살아볼 수 있는 가능성을, 예술성과 완성에 대한 고집이나 창작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그 밖도 수용함으로써, 열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좀 더 유연하고 좀 더 영악하게 똑똑하고, 완벽보다는 지속과 실천과 수행에 무게를 두면서 쓰기. 그리하여 나는 살고, 사랑하고, 겪고, 경제활동하고,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책임질 줄 알게 되면서도 계속 쓰는 사람일 수 있지 않을까.
이 쓰기는 세계에 대한 '나의 느낌'이 둔감해지지 않도록 내가 취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이 세계에 스미도록 나를 열어두면서도 사람들의 말, 그들의 욕망, 그들이 느끼고 반응하는 방식, 그들이 그리는 세계상이 과연 나에게 어떤 위화감도 없는지, 어떤 마찰도 일으키지 않는지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변화한 시대, 사회적 조건에서의 영화에 대한 윤원화의 다음과 같은 말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내가 정말로 제정신인가 하는 의문을 가진 상태로 자신의 의혹을 객관화해야 해요.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위화감이 느껴지는 저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맞은 편에, 나는 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라는 질문이 마주 서있어요. 이 질문들의 선후관계가 역전되면, 내가 무엇이 될 수 있고 어디에 근거할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 그걸 비춰 볼 수 있는 거울로서의 영화가 필요해집니다. 그러니까 영화는 죽었습니까, 라는 질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예술은 어디서 태어나고 있습니까, 누가 그것을 기르고 있습니까, 그런 질문이 되는 거죠."
영화를 글로 대신해서 읽어도 좋다. 나는 무엇을 느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는 삶의 다양한 가능성 중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지, 나는 어떤 시선과 태도를 기르고 싶은지 되돌아보기 위해 글쓰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건 뭐지' 혹은 '이게 아닌데' 하는 의혹의 실마리들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또 내 밖으로 나온 글을 마주 대하며 거울처럼 날 비추어보고자 계속해서 써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쓰기에 대한 내 질문은 어떻게 글이 삶과 함께 갈 수 있는가, 예술적인 창작을 지향하면서도 이에 대한 바람과 집착이 삶을 집어삼킬만큼 초조해하지 않을 수 있는가, 어떻게 사회인으로서 직장인으로서 변화를 감사히, 흥미롭게 받아들이면서도 내 감각이 무뎌지지 않도록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행복한, 행복하게 하는, 하지만 나약하거나 쉽지만은 않은 글쓰기를 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에 대한 답은 오로지 경험과 실천 속에서 회고적으로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답이야 뭔들, 무엇이든 쓸 생각을 하니 설레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