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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Nov 06. 2023

멍 때리기

멍 때리기 좋은 장소


밖에 비가 온다. 사람들이 납작하고 평평한 우산 속에 머리를 감추고 걸어간다. 테라스의 천막 끝으로 빗방울이 흘러내려 차례로 떨어진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고 유쾌하고 음악적이다.


나는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있다. 좀 전에 두 손으로 머그를 둥글게 쥐었을 때는 김이 올라오면서 온기가 진하게 전해졌는데, 지금은 그저 미지근하다. 구름같이 뿌연 목소리의 발랄한 재즈가 공간을 채우고 있다.

 


오늘은 글 한 편을 읽으려 카페에 왔지만 무언가 읽기보다는 시선을 멍하게 풀어지게 두고 싶은 상태다. 며칠 전부터 '멍 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난 금요일 밤에는 무언가 불타는 것을, 불길이 활기있게, 임의적, 율동적으로 일렁이는 것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게 일었는데. 어떤 불길도 응시하지 못했다. 집에 와서 습관적으로 갑갑한 스크린에, 사방이 거울인 그 반사-공간에 스스로 가두어지는 것을 느끼다 잠들 뿐이었다.


오늘은 그래서, 카페에 와 빗방울이나 행인들이나 식물들을 응시하고 있다. 내수동의 오래된 이 카페에는 건강하고 생기있는 화분들이 가득한데, 그 중 큰 것들은 카페 중앙 테이블에 일렬로 놓여, 각기 다른 녹색으로 넓은 잎, 긴 잎, 줄무늬, 얼룩무늬의 잎들을 뻗어내며 서 있다. 창가에는 보다 작은 화분이 귀여운 리듬을 만들어내며 줄지어 있다. 이 카페에는 모든 것이 가로로, 세로로 규칙적인 듯 불규칙하게 늘어서 있다. 커피포트가, 머그가, 유리컵이, 만화책이, 문학과 인문 서적들이, 작은 소품들이.


비가 계속 온다. 일방통행의 일차선 골목으로 한 명, 두 명, 걸어간다. 지난 주말에는 리움미술관에 강서경 작가의 개인전을 보러 갔다. 강서경이 만들어내는 따뜻하고 둥글고 우람하고 당당한 형태들, 버들잎처럼, 빗줄기처럼 흘러내리는 털실과 철사들. 그녀의 조형물들이 이야기하는 공간과 시간과 관계,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전통에 대한 세련된 재해석. 그 모두가 감각적으로, 감정적으로, 지적으로 뭉클하고 멋지고 즐거웠다.



강서경 작가를 오래 좋아해온 사람으로서 모든 작업들과 나름의 방식으로 닿았는데, 그 중 특히 전시장 입구에 만들어 놓은 공간, 앞으로의 작품들과의 느린 교감을 준비할 수 있게 하는 도입같은 세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정井 버들 #22-01,02,03> (2020-2022) 이라는 제목을 단 작품이다. 일종의 '멍 때림 자리' 라고 할까? 불멍, 달멍, 산멍을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멍-장치' 라고나 할까?


형식적으로는 단순하다. 창문 같은 사각 공간이 있고 그 안 반투명한 패널에 짧은 시가 한 구 적혀 있다. 지붕처럼 둥글게 위를 덮는 구조물에는 초가집 처마에 걸려 있을 법한 짚 혹은 나뭇가지로 된 조형물이 공기가 흐르는 대로 천천히 회전하고 흔들린다. 철과 나무로 이루어진 사각 틀의 곳곳에는 실이 감겨져 있고 새끼줄을 묶듯 작은 매듭이 중간중간 지어져 있다.



앞에 마련되어 있는 나무 둥치에 앉아서 그 둥글고 사각진 빈 공간을 들여다본다. 반투명하게 떠오른 시어들은, 예컨대 “버들은 실이 되고 / 꾀꼬리는 북이 되니” 하며 이어지는 시는, 달과 산과 강아지 짖는 소리, 버들과 꾀꼬리와 시름을 이야기한다. 그 앞에 앉아 이미지들을 곱씹고 어떤 고요하고 시적인 시공간을 상상하면서 가만히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는 것을 본다.


이 최소한의 둥글고 향토적인 구조물과 고즈넉한 연상을 이어가게 해주는 몇몇 단어들로 전시장에는 또 다른 시공이 마련된다. 어느 덧 나는 개울이 지줄대는 시골 초가집 처마에 앉아 있다. 여느 고요한 저물녁이다. 한바탕 멍 때리기 좋은 자리라고 생각했다.


왜 멍하고 싶은 것일까?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들이기보다는 두고 싶고, 그냥 그 순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괜찮고 싶다는 것인지도. 약속과 의무와 바람에 눌린 어떤 신체, 지상의 무거운 물질이 아니라,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는 듯한 정신, 분위기, 기분이고만 싶은 것인가? 그저 멍하고 멍청하고 무게 없는 기분일 수 있다면. 빗물처럼 둥글게 주욱 떨어지거나, 광택있고 주름진 잎을 넓게 펼치고 있는 식물처럼, 그저 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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