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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Dec 05. 2024

어느 가을 편지

나의 멋쟁이,

저는 지금 제주도에 왔어요. 한 카페에 와서 인도식 짜이 티를 시켰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굵은 바람이 불었어요. 들창을 한 아름에 들어 뒤집을만큼 두터웠어요. 소매자락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다 습기에 다른 곳에 왔음을 실감했습니다. "가을 장마인 것 같애" 라고 택시기사는 기상을 예보합니다. 앞으로 삼일 동안 어떤 바람과 비와 온도가 이 공간의 풍경을 이룰까요?


비행기에서 브람스의 피아노 왈츠곡 하나를 ( Op. 39, No.9 in D minor ) 듣기 시작했는데, 그 소리와 정서가 좋아 헤드셋을 끼고 앨범 전체를 듣고 있어요.


[하지만 이 문장을 쓰고 얼마 되지 않아 카페는 음악 소리를 키웁니다. 힘찬 통기타의 스트로크에 얹혀지는 오렌지빛 보컬. 저는 헤드셋을 벗습니다. 가을은 왈츠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어쿠스틱 기타와도 정말 잘 어울리니까요. 같은 음악도 가을에는 짙은 갈색의 낙엽같은 서글서글한 질감이라면, 겨울에는 공기 중 퍼져나가는 입김처럼 그려져요. 나의 멋쟁이, 당신에게도 그런가요?

그런 의미에서 올 가을 당신에게 음악을 하나 추천드린다면 Bon Iver 의 Flume 입니다. 이 밴드는 두 입으로 한 소리를 내는 듯한 독특한 보컬이 특징적이에요. 또 음향을 만지고 쌓는 감각이 돋보적입니다.

오늘은 피아노 선-율처럼 정교한 선으로 얇고 길게 뽑아낸 마음 대신, 더 왁자지껄한 마음과 더 넓은 무정형의 감응력을 가지라는가 봐요. 섬세한 선묘 대신 물감을 흘리고 붓고 뿌리는 잭슨 폴록이나 스미게 하는 헬렌 프랑켄텔러 같은 마음으로? 오늘은 '넓이' 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네요. 평소의 저와는 반대로요. 보통 저는 폭이 좁은 얇은 길을 거닐고 있어요. 도시와 일과와 내면성 같은 것에 애착을 느끼는 사람이 고수할 법한 정돈된 길 말이에요. ]




이곳에 오기 전 하루는 독서 여행을 하자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막상 타인의 삶과 이야기에 그렇게 몸이 열리지 않는 것 같아요. 어떤 책을 가져왔느냐고요? 그제 책장에서 무턱대고 꺼내온 존 버거의 <A가 X에게>와 미셀 푸코의 르네 마그리트에 대한 미술 비평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 두 권이에요.


존 버거를 아직 한 권도 완독하지 못했어요. 산문 여러 편을 이런 저런 상황에서 발췌해 읽고, 그의 문장력이나 글의 리듬감, 분석력, 미술에 대한 깊이있는 지식, 따뜻한 시선에 여러 번 감탄했지만요. 이상하게 그의 책을 펼쳐서는 페이지를 진득하게 넘기지 못했어요 . 제가 택했던 존 버거의 작품들이 서사가 누적되고 심화되는 일반적인 소설과 달리, 하필이면 어느 페이지에서 시작하든 어디서 그만두든 크게 달라지지 않는 병렬적인 글들이었기 때문일까요. 오늘 <A가 X에게> 를 읽다 덮으며 드는 생각은 제 공감의 폭이 좁아서 (여기 또 '폭'이라는 넓이의 단어가 등장합니다.) 일지도요.


저는 어떤 이야기가 지금의 저와 깊게 닿지 못한다고 느낄 경우 읽기를 지속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인지적으로 도전적이고 흥미롭거나 글이 내밀하고 촉각적이거나, 혹은 어떤 매혹적인 감응력, 날카로운 분석력, 확장적인 상상력을 가진 인물의 시선이 돋보이는 글의 경우에는 문장과 문장의 틈으로 파고들듯 빠져들지만요.



이 소설 속 존 버거의 인물들은 이 세상을 강인하게 살아가며 따뜻하게 만들고 사랑하면서 저항하지만, 어떤 '이후'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제가 공감하지 못하는 혹은 들여다보기 두려워하는 영역에 있습니다. 어떤 이후냐고요? 부서진 이후, 깨진 이후 입니다.​​​


많은 예술이 '이후'의 감수성을 이야기합니다. 난민, 기후변화, 전쟁, 트라우마를 다루는 작품들이 대표적으로 그러하겠지요.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경향성이 크게 꺾인 사건들, 이 변환이자 반환의 지점을 아프도록 겪어야 했더 사회 경제적, 젠더 인종적, 혹은 운명적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이후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 정서는 분명 유의미한 동시대적 감수성입니다. 비단 감성이기 이전에 삶입니다. 그런데 이에 정서적인 거리감을 느끼는 저는 어떤 최음제적 꿈과 환상을 간직하고 싶어하는 걸까요? 부서지지 않고 변형되고 싶은 걸까요? (부러지지 않고 휘는 자들이 있습니다만. )

"삶의 전체를 받아들이고 싶어." 이러한 말을 몇 번 뱉었습니다. 아름다움 뿐 아니라 늙음, 병, 죽음, 폭력, 고통까지도. 이러한 말을 뱉었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나의 멋쟁이​, 그래요 요즈음의 저는 전혀 첨예하지 않고 헬렌 프랑켄텔러처럼, 그 염색 천 같은 그림처럼 퍼져있어요. 시간의 캔버스에 색으로 스밉니다. 어제는 무슨 색이었지? 그제는? 기억을 하지 못하겠어요. 시간이 얼룩을 남길 뿐입니다. 이래도 되는 걸까요?


존 버거는 <A가 X에게>의 첫 페이지, 한국 독자에게 건네는 서문에서 문학의 정문과 옆문, 뒷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문학의 집에는 여러 개의 입구가 있습니다. 계단과 양 옆의 기둥까지 갖추고 있는 정문이 있지요. 그 문으로 들어갈 때는 마치 궁전에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또한 옆문도 있습니다. 더 소박하고 더 개인적인 문. 이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고독합니다. 그들은 혼자 다니지요.

그리고 뒷문이 있습니다. 부엌으로 바로 들어가는 문, 요리사와 접시닦이, 장사꾼들이 이용하는 문이지요. 그곳은 항상 소란스럽습니다. 많은 것들이 드나드는, 바로 그 문이 아이다와 사비에르, 그리고 제가 이용한 문입니다. 늘 서로에게 말을 건네면서요.



분산적인 편지. 쓰는 저 조차도 저의 지금을 기둥과 들보와 지붕으로 빚어내지 못한 채 씁니다. 그저 펜이 이끄는 대로 사고가 흐르는 대로 자극이 오는대로 반응하며 씁니다. 뒷문의 문학, '뒤' 정도의 지위. 문학의 위계를 오래 학습해온 저에게 오늘의 편지는 살아있는 뒤의 글입니다. 왁자지껄 합니다.

어쩌라는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그저 오늘은 이럴 뿐입니다.

찻잔은 비워졌고, 해는 저물었고, 저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보렵니다.


당신의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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