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에 펼쳐진 시간
붉은 나무 표지를 손끝으로 더듬는다. 이것은 내가 기다리던 바로 그 책이다. 메뉴판 - 한 접시 안에 베어있는 겹겹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첫걸음은 메뉴판을 읽는 것이다.
"브라바스 소스를 곁들인 감자, 브로콜리"
낯선 이름을 마주한다. 번화가 골목의 한 스페인 음식점에서였다. 나는 브라바스 라는 이름을 혀 안에서 굴려본다. 이 메뉴를 주문했을 때 맛보게 될 즐거움을 상상한다. 감자 디쉬라면, 주재료인 감자를 어떻게 요리했을까? 삶거나 튀겼을까? 버터향을 뭉근히 입혔을까? 브로콜리는 감자와 어떻게 어울리지? 브라바스 소스는 뭘까?
메뉴판에 적힌 글자 뒤 편으로 어렴풋한 상이 떠오른다.
짙은 녹색의 브로콜리와 포슬거리는 감자, 그 사이를 흐르는 붉은 소스. 물감처럼 흩뿌린 파프리카 가루. 나는 글자 곁에 아른거리는 그 음식을 상상 속에서 맛보고, 지금 이 맛을 원하는가, 물으며 혀 끝의 대답을 기다린다.
함께 식사하기로 한 친구가 혹여 늦어진다고 하면 더욱 좋았다. 나는 "메뉴 좀 미리 주시겠어요?" 하고는 메뉴판을 부푼 마음으로 찬찬히 감상한다. 종이의 두께와 색깔, 재질부터, 글꼴, 배치, 그림, 음식명 밑에 작게 적힌, 맛의 시간을 농축한 설명까지.
- 스페인의 대표적인 타파스 요리 '파티타스 브라바스'(용감한 감자)를 변형한 메뉴. 토마토 베이스의 매콤한 소스를 곁들여 강렬하고 향긋한 느낌을 줍니다.
키오스크나 태블릿이나 QR 코드를 마주할 때면 마음이 황량해진다. 이런 중요한 준비의 순간을 납작하고 지루하게 만들어 버리다니. 스크린 너머로 보이는 이미지와 글씨들, 누르는 즉시 주문이 들어가는 효율적인 인터페이스에는 음식과 나 사이, 지금과 이후 사이의 공간이 없다. 기대와 상상이 피어날 여백이 없다.
선택과 주문을 해야 할 때면 나는 그날의 식사를 컴포지션하기 시작한다.
"둥근 것은 위로, 네모는 아래로, 사선을 넣고 붉은색으로 점을 찍을까?" 하며 화면을 구성하듯, 그날 우리가 원하는 바삭함과 슴슴함, 매콤함이나 부드러움을 생각하는 것이다.
도전을 원하는가 혹은 익숙한 맛을 찾는가? 단백질의 종류는? 탄수화물의 모양은? 지금 속은 얼마나 비어있고 어느 정도로 채우고 싶은지 가늠하며 이리저리 음식을 배치해본다.
이것과 이것.
"얘는 새콤하니까 곁들이면 잘 어울릴 것 같아, 이 친구도 한 번 시켜볼까?" 하며 그날 우리의 후각과 미각, 그리고 대화에 얽힐 음식을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지금의 몸에 접속하고 다가올 맛을 상상하는 즐거움은 먹을 때 만큼이나 크다.
여긴 어떤 메뉴가 있을까, 음식의 시간을 어떻게 종이에 펼쳐 놓았을까. 기대하며 식당에 들어선다.
오늘의 책을 펼쳐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