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기이한 당근 피클

병 속에 무엇을 담을까

by 지도그림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집 『기묘한 이야기들』에 수록된 작품 중 「병조림」이라는 단편이 있다. 한 어머니가 조리고 절인 괴이한 음식들과 이를 먹는 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놉시스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연금 생활자인 어머니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오십이 넘은 아들이 있는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지하실 찬장 선반에서 그녀가 남긴 온갖 병조림들을 발견한다. 아들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방구석에서 축구 경기를 보면서 병들을 차례차례 따서 먹기 시작한다. 그러다 어떤 일이 발생하는데...


소설 속 어머니는 음식 뿐 아니라 스펀지, 신발끈 같은 사물도 병에 넣는다. 이야기는 옷장 바닥, 신발장, 욕조 밑 후미진 곳, 침대 옆 나이트 테이블 안에서 발견한 기이한 병조림들에 대한 경악스런 묘사로 가득하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이다.


지하실에서 그에게 무엇보 다 섬뜩한 충격을 준 건 벽 쪽에 세워진 찬장이었는데, 선반마다 저장 식품이 담긴 반짝이는 유리병들로 그득했다. 각각의 병에 는 접착식 라벨이 붙어 있었는데, 좀 전에 레시피 노트에서 본 요리명들이 거기에 적혀 있었다.
“스타시 부인의 레시피로 소금물에 절인 미니 오이피클, 1999년“, ”술안주용 절인 피망, 2003년", “조시아 부인의 라드.” 개중에는 "살균 밀페 요법으로 저장한 풋강낭콩"처럼 생소한 명칭도 있었다. "살균 밀페 요법“이 대체 무슨 뜻일까,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유리병의 액체 속에 으깨진 상태로 담긴 창백한 버섯들과 형형색색의 채소, 핏빛 피망들을 보니 갑자기 삶의 의욕이 솟구쳤다.

p.50-51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아들이 발견하는 것은 더 역하고 괴상해진다. 아들은 감동과 혐오가 뒤섞인 심경으로 이들을 들여다본다.


라벨에는 "건포도 퓌레에 든 단호박" 또는 단호박 퓌레에 든 건포도"와 같이 비슷비슷한 명칭들이 반복적으로 적혀 있었다. 완전히 잿빛으로 부식된 미니 오이피클도 발견되었다. […] 절인 버섯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젤리로 팽창해 병 속을 꽉 채웠고, 잼은 검은 협전처럼 엉겨 붙었으며, 파테는 쭈글쭈글 말라서 조그만 주먹처럼 뭉쳐 있었다.
[…]
그러던 어느 날, 부엌 싱크대 밑에서 "식초에 절인 신발 끈, 2004년”이라는 라벨이 불어 있는 병을 발견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탁한 액제 속에 실타래처럼 감긴 채 동동 때 있는 갈색의 신발 끈과 그 사이에서 헤험치고 있는 같은 울스파이스 덩어리들을 응시했다. 뭔가 불편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뿐이었다.
p.54-55


어머니는 왜 이렇게나 많은 병조림을 만들었을까? 무언가 간직하고 보존하고 싶은 마음이나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는 수집벽 때문일까? 아들에게 삶의 시간을 넘어서는 것을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일까? 죽음 이후까지 아들의 생활을 돌보려고 식량을 비축해둔 것일까? 이 괴상한 유품들을 통해 어머니의 온화하면서도 기괴한 면모가 드러난다. 극단의 병조림까지 나아가는 그 마음의 폐쇄성, 집요함, 어떤 뒤틀림과 말 못할 억압들.


한번에 먹고 끝나는 요리가 아니라 음식을 밀폐, 밀봉해 피클을 만들었다는 것이 주는 기묘한 느낌이 있다.어머니는 죽었지만 이 보이지 않는 생명체들은 계속 소화하고 배설시키며 향미 혹은 독극물을 형성해낸다. 어머니가 작동시킨 병 속 화학적 관계망은 시간 속에서 부패하고 발효되는 미생물들의 군집체가 된다.

찬장을 가득 채운 병들이 풍기는 미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어느 날, 연희동을 산책하다 찬장을 가득 채운 유리병들을 보았다. 「병조림」의 묘사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이끌린 듯 이곳에 들어갔다. 투명하고 깨끗한 공간, 줄줄이 늘어선 병 속 액체에 잠겨 있는 물질들. 소설처럼 기이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이 병들은 조림과 절임에 대한 층층의 기억을 일깨웠다.


라벨은 다채로웠다.


오이 피클, 양파 피클, 당근 피클, 목이버섯 피클, 단호박 피클, 고구마 피클, 고사리 피클, 레몬 생강 피클, 루바브 달걀 피클, 레몬 유자청, 하귤 생강청, 딸기 블루베리잼, 토마토잼, 보늬밤잼, 호두연근 병조림, 토마토 병조림, 살구 복숭아 병조림…

나는 어떤 맛을 상상하며 입맛을 다셔야 할지 알지 못한 채 병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이야기와 이미지들이 교차하던 시절, 나는 창고를 뒤져 유리병을 찾아냈다.


그리곤 병을 끓는 물에 소독하기 시작한다. 요리책을 열었다 덮었다 반복하고 조리대에 놓인 투명한 병을 며칠 바라본다. 그러나 마침내 "그래 병 절임을 만들자." 한다.

절임, 피클링은 가장 간단한 절임 중 하나이다. 이는 소금물로 미생물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이다.



발효 절임의 일반적인 방식은 이렇다. 1단계, 채소를 소금물에 담근다. 2단게, 기다린다. 3단계, 먹는다. 그리고 이렇게 완성된 음식은 미생물들이 만들어낸 독특한 맛이 난다.


예로부터 절임 기법은 음식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이루어져 왔다. 어째서 소금물에 담그면 오래 보존될까? 높은 염도와 산도가 특정 미생물을 살리고 특정 미생물을 쫓아내기 떄문이다.

절임 과정 초기에 해로운 곰팡이 같은 호기성 미생물은 신선한 공기를 빼앗긴 채 물 속에 잠기자마자 빠른 속도로 죽는다. 염분을 견디지 못하는 미생물 또한 같은 운명을 맞이한다. 이 단계에 번성하는 미생물 중 하나인 류코노스톡 메센테로이데스는 이산화탄소와 젖산을 생성한다. 이 미생물이 번영해 생성한 젖산이 피클링 액체의 산성도를 점점 떨어뜨리면 마침내 그곳은 이 미생물 자신도 살기 힘든 환경이 된다. 그러면 락토바실러스 플란타룸처럼 산성 환경을 좋아하는 박테리아가 등장하여 무대를 장악한다.

대표적인 미생물들을 이야기하자면 저 두 종류이지만 실제 절임 과정에서 많게는 수십 가지 종의 박테리아와 균주가 환경이 달라질 때마다 주도권을 바꿔가며 활발하게 활동한다. 이 과정 동안 병 속 공간은 해로운 미생물들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 된다.



균의 마법을 나도 부려볼까? 첫 피클은 냉장고에 가득한 당근으로 만들기로 한다. 온갖 기괴한 피클을 향한 첫 단추라고 해야 할까. 나는 당근을 꺼내 씻고 껍질을 벗기고 한 입 크기로 썰었다.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식초, 설탕, 후추 등 기본적인 재료들과 함께 한 소끔 가열해 당근을 담은 유리병에 붓는다. 그리고 뚜껑을 닫고 냉장고에 넣고 기다린다.



나는 내 당근 피클을 바라본다. 냉장고에 든 저 병 안에서 지금 어떤 과정이 일어나고 있을까? 삼일 뒤 나는 유리병을 열고 당근 조각을 꺼내 맛본다. 당근 조직이 살짝 물러 있고 은은한 단맛이 난다. 마트에서 파는 피클보다는 맛과 향이 훨씬 약하다. 대신 당근이 살짝 표정을 바꾸기로도 한 듯 새콤하고 부드럽다. 오늘은 이렇다면 열흘이나 한달 뒤에는 어떨까? 누가 어떻게 맛을 바꿔 놓았을까?


언젠가 주방 찬장에 각가지 생명이 든 색색의 병들이 나란히 놓이는 상상을 하며 새침해진 당근 조각을 입에 넣는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