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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전시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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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Oct 26. 2018

전시를 ‘잘 보았다’는 것

관람객의 마음을 달뜨고 두근거리게, 궁금해지고 알고 싶게 하기

 "요즘 저희가 공부하는 작품들이 많이들 있더라고요."

 여름방학 동안 한국현대미술사를 공부하는 스터디에 들었었다. 네다섯째 모임 쯤 되었을 때 함께 공부하던 몇몇이 덕수궁 미술관에서 하는 <근대의 걸작전>에 다녀왔다고, "직접 보니까 더 좋더라고요" 한다. 꼭 가봐야겠다 벼르다 보니 스터디도 다 끝났고 따가운 한낮의 날씨도 제법 선선해졌다. 어느 비 오는 초가을, 마침내 오랜만에 만나는 고등학교 친구와 미술관을 찾았다.

 고희동의 <자화상>을 시작으로 전시관 벽에는 그림들이 하나하나 걸려 있었다. 우리는 <자화상> 앞에 나란히 섰다. 책에서 본 작은 도판과 똑같이 생겼네, 하며 옆을 힐끗 보니 친구는 으음-하고 있다. '진짜 미술관'이 처음이라는 친구에게 그림을 소개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입이 달싹거리더니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고희동, 이 사람 한국 미술사에서 되게 중요한 사람으로 나와. 조선이 원래는 동양화만 그렸었잖아, 그런데 고희동이 일본에 가서 처음으로 서양화를 배워 와서 조선에 서양 화법을 전파한 거야. 미술 교육 같은 것도 하고. 이게 그 사람의 자화상인 거지."

 친구는 흥미롭게 들었다. 고희동의 자화상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작품도 내가 공부한 그림이었다. 너로구나, 그림을 보고, 이름을 확인하고, 맞아 이 작가였지, 이게 여기 와 있구나. 눈은 작품에 머물렀지만 머리는 기억 속의 온갖 정보들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 "아- ", 이건 말이지- 그러나 조용한 미술관에서 내 입과 내 머리만 조바심을 내며 뭔가를 급히 뱉어내려는 것 같은 찜찜함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입 안에서 숨은 퉁 퉁 튕기고 있었다.


고희동 <자화상>
구본웅 <친구의 초상>


 "저거 눈 밑에 빨간 건 뭐지?"

 친구 뒤편에 서서 구본웅 그림이구나, 하며 어둑한 배경에 일그러진 얼굴의 울퉁불퉁함을 겉훓고 있던 나에게 친구가 물어왔다.

 "아이라인인가? 화장한 거야?"

 친구는 그늘진 눈 밑에 붉은 선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이라인이라니, 저건 화가가 대상의 특징을 더 잘 전달하고 표현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서 색채를 왜곡한 것인데, 예상치 못한 친구의 질문에 이런 저런 설명을 하고는 가만 보니 아이라인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다.

 -한 쪽 얼굴이 검은 게 좀 느낌이 그러네.

 -약간 슬퍼 보인다.

 -제목이 <친구의 초상>, 친구, 뭐 이상? 이게 이상을 그린 거라고? 소름끼친다. 와, 내가 읽은 그 날개 쓴 이상 말하는 거 맞지? 너무 딱 맞아. 너무 똑같아.

 친구의 코멘트에 나도 나에게 보이는 바를 한 두 마디 덧붙이다보니 마음이 점점 가라앉는다. 우리는 한 그림 앞에서 몇 분이고 저게 무엇일지, 어떤 느낌을 주는지, 모델의 포즈가 어떤지, 만약 저 요소가 없었다면 어떻게 보일지 이야기했다. 덕분에 나도 그림을 비평 지식의 틀 안에 넣기보다 그 자체의 색과 형태를 감상하고 그림이 자아하는 인상들을 말로 옮겨보려고 곱씹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작품 하나하나가 포즈나 배치부터 색과 붓터치, 전체적인 조화 하나하나에 다 신경을 쓴, 작가의 고민과 노력이 낳은 아름답고 완결된 결정체 같았다. 오랜만에 내가 그림을 그 자체로, 정말 보고 있음을 느꼈다.

 이전에 자주 보았던 작품들이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왔다. 정규의 <교회>는 교회의 온화하고 따스한 풍경을 단순히 분할된 면으로, 가을의 색들을 칠해 그렸는데 조화롭고 고요했다. 론도 음악의 깔끔한 구성과 인상을 반복적인 형태로 딱 맞게 옮겨 놓은 듯 한 김환기의 <론도> 도 마음에 남았다.  


정규 <교회>
김환기 <론도>



 그림을 즐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선은, 무엇보다도 맑은 눈이 아닐까 싶다. 앞에 있는 대상을 그 자체로 충분히 들여다보려고 하는 차분한 열린 마음과 그 때의 눈 말이다.

 보들레르의 <현대적 삶의 화가>에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예술가로서 보려면 우선 아이의 눈을 되찾아야 한다는 대목이다.

 아이는 모든 것을 새로움으로 바라본다. 아이는 언제나 도취되어 있다. 아이가 형태와 색깔을 흡수하는 기쁨보다 영감이라 불리는 것에 더욱 유사한 것은 없다. (중략) 그것이 혹여 얼굴 혹은 풍경, 빛, 금빛, 색깔, 현란한 옷감, 화장으로 아름다워진 아름다움의 매혹 등 어떤 것이든 간에 새로운 것 앞에서 아이가 갖게 되는, 고정되고 동물적으로 황홀해하는 눈빛은 바로 이 같은 깊고 환희에 찬 호기심 때문이리라.


 본다는 것은 본디 즐거운 것이다. 미술, 또는 시각적인 모든 것에 발을 들여 보던 좀 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아이의 눈을 빛내는 내가 있다. 그림 앞에서, 혹은 어떤 사물이나 이미지 앞에서 나는 그것이 발산하는 매혹과 매력에 호기심이 일어 발이 묶인 채 감탄했었다. 계속 바라보는 것으로 고동을 누그릴 수 있을 뿐인 질투를 느꼈다. 이 마음을 흘려보내기 아쉬워 나는 열심히 단어를 찾았고 아름다움을 이해해보기 위해 공부했다. 그런데 어느새 전시장에서 눈을 감고 숨차게 기억 속의 말만을 뱉어내고 있었다니! 어떤 위대한 말인들 인상과 매혹은 완전히 언어로 환원될 수 없고 지식에 갇혀 겉핥기로 눈도장을 찍을 때 마음엔 아무 새로운 것도 더해지지 않는 법인데 말이다.


Cabinet of Curiosities


 아이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이런 '아이'가 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은 전시장이 아니면 어디겠는가? 전시라는 것은 그 기원부터 '아이' 같은 사람들로부터 비롯되었으니 말이다. 신기한 사물들을 보며 무궁한 매력과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은 Cabinet of Curiosities라는 이름으로 희귀하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대상들을 진열했다. 그것이 공공연하게 전해지는 최초의 근대적 형태의 전시이다. 이는 하나의 목적 즉, 보는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영감과 기쁨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 계승자인 오늘날의 여러 전시들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달뜨고 두근거리게, 궁금해지고 알고 싶게 하기. 사람들을 매력적인 사물들로 둘러싸면서 전시는 관람객들을 초조하게도 흥분하게도 하고,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시를 제대로 보고 싶다면, 진열된 것들의 매력에 도취되고, 감염되고, 이를 즐기려는 마음과, 맑고 투명한 눈을 준비해 갈 것을 권한다. 그 끝에 심장의 고동이나 호기심이나 즐거움- 이 중 하나라도 품고 나온다면, "그래 잘 보았다," 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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