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의 창의력과 상상력, 유쾌함과 섬세함이 집약된
윤영의 손은 페이지 끝을 만지작거렸다. Les Plats 의 고기류에서 머물던 눈길은 어느덧, 디저트란의 작은 글씨들에 예리하게 꽂혔다. 옅은 미소가 입꼬리부터 피어올랐다. 작은 함성이 뱃속에서 목구멍 끝까지 터져 나왔다. 이것이 윤영이 오늘 여기에 온 이유이다. ‘시즐’의 디저트 메뉴. 박 셰프의 창의력과 상상력, 유쾌함과 섬세함이 집약된, 미식계의 재미있는 도전이자, “새로운 방향” 이라고 윤영이 한 때 적었던 바로 그 디저트를 맛보러 윤영은 오늘 여기 온 것이다.
디저트란에는 과일과 꽃, 두 섹션이 있는데, 제철 과일과 꽃을 주재료로 한 메뉴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워진다. 올 가을, 미색의 두터운 종이 위쪽에는 ‘사과’, 아래쪽에는 ‘국화’라 적혀있다. 그리고
기울어진 명조체로 인쇄된 여섯 글자가 아직 열지 않은 편지의 제목처럼 윤영을 마주한다. 이런 이름을 가진 디저트는 어떤 맛일지. 여태껏 사과는 많이 먹어왔지만 "파리스의 심판" 을 먹을 생각을 해 본적은 없었다. 글자들이 마음 사이사이로 들어와 윤영은 부풀어올랐다. 윤영은 메뉴판을 책처럼 들고 아래의 짧은 설명을 읽어나갔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세 여신이 한 자리에 모여 최고의 아름다움을 겨루는 시합이 열렸습니다. 심판은 젊은 목동 파리스.
여신들은 각각 자신을 승자로 뽑아주는 대가로 조건을 겁니다. 헤라는 부귀영화와 권세를, 아테나는 전쟁에서의 승리와 명예를,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약속하지요.
파리스는 누구에게 황금 사과를 주어야 할까요?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의 약속 중 무엇이 그에게 가장 매혹적이었을까요? 오늘 이 황금사과를 맛볼 당신은 무엇에 끌리게 될까요?
윤영의 시선은 잠시 글자 사이에 머물러, 상상을 해 본다. 흰 접시가 테이블에 놓이는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진다.
사과는 어떻게 요리되어 나올까? 세 조각으로 쪼개어져 있을까? 시나노골드 같은 노란 사과를 썼을지도 몰라. 나라면 원형의 넓은 접시에다가 황금빛 시럽을 드리즐해서 플레이팅을 할 거야. 아니면 녹차 샤베트로 푸른 잔디를 만들거나.
그런데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는 무엇으로 표현했으려나? 권력의 맛, 승리의 맛, 아름다움의 맛은 어떨까? 심판 같은 강렬함으로 끝맺는 건, 아니야 그건 너무 식상한가. 그래서 먹고 나서 결국, 나는 누구를 고르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