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도그림 Sep 13. 2019

03. 불의 향연

언제나 실험하고 개발하는 저희 불의 맛을 경험해보시길 바랍니다.

 모두에게는 처음이 있지요. 제 처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시겠어요? 저의 첫 새우, 첫 닭, 첫 불, 첫 도미, 첫 손님… 돌이켜보면 모든 처음에는 그 첫 순간을 저와 함께했던 사람들이 생생하게 있습니다.


 첫 밥을 짓던 어린 시절 물이 찰랑이는 밥솥에 제 손을 넣고, 손등까지 물이 닿아야 한다, 하며 위치를 콕 집어 주던 어머니부터, 이쑤시개로 새우의 내장을 빼는 법을 알려주던 중학교 친구, 그 때 함께 만들었던 토마토 스파게티. 방학 때면 한 두주씩 머물곤 했던 바다 마을 외할머니 댁에서 저는 일손을 도와 소라 살을 빼고, 홍합을 해감하고, 가자미, 도미, 광어를 손질했지요.

 “이리 칼을 넣고 요리요리 만지면서 이리 한번에 확 긋고 여 뼈를 잘 봐야혀 알겄지? 항시 도마를 깨끗하게 해. 그지 자 한 번 해봐.”

하며 제게 칼을 넘겨주던 외할머니. 그러면 저는 어설프게 회를 떴고 친척들은 와사비를 푼 간장에, 여 잘 하네, 하며 한 점씩 찍어 먹곤 했습니다.  






 지금 이야기하려는 처음은 이것보다는 조금 후의 일입니다. 첫 불 이야기이지요. 요리를 하면서 불이야 여러 번 사용해왔지만 이 날은 제 마음 속에 진정한 ‘처음’으로 기입되어 있습니다. 퓨전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인턴을 한 지 4개월이 되어가던 시기의 일입니다. 그 당시 저는 요리학교를 다니고, 온종일을 주방에서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레시피북이나 요리에 대한 과학, 인문학 책들을 읽다 어느새 잠이 들곤 했습니다. 주말이면 몇 안 되는 돈을 모아서 유명 레스토랑에 간다든가, 미식 여행을 한다든가 하며 저의 세계는 맛에 대한 탐구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법은 저에게 미지의 영역이었습니다. 방금 장 본 신선한 재료들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간하고, 조합하고, 조리하고, 그렇게 해서 한 시즌의 새로운 레시피들을 만들어내는 셰프들을 저는 늘 동경의 눈길로 바라보았습니다.

 특히 불. 저는 불 앞에만 서면 긴장하곤 했는데, 저의 음식은 어딘가 모르게 조금 눅눅하든지, 겉과 속이 고르게 익지 않았든지, 표면이 충분히 갈색으로 구워지지 않았든지, 더 졸여질 필요가 있다든지 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미묘한 차이라 어깨를 으쓱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제가 먹어본 훌륭한 요리들과의 한 끗 다름에 저는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저녁, 저는 김원영 셰프가 스테이크를 굽는 것을 처음으로 바로 옆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 주방에서 재료 손질을 담당했던 제 자리는 싱크대 근처의 커팅 보드 앞이었던 터라 불길은 주로 소리로 전해질 뿐이었는데, 이 날은 달랐던 것입니다. 김원영 셰프는 주방의 그릴에서 피어 오르는 강력한 불 앞에 서서 정확하고 자신있는 손놀림으로 스테이크를 구웠습니다.

 저를 사로잡은 건 그 우아한 움직임보다도, 셰프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는 고기의 표면을 관찰하고 있더군요. 고기가 불에 닿았을 때 바로 지글지글 소리를 내지 않으면 숯을 더 넣어서 불길이 세지도록 하고, 표면이 너무 빨리 구워진다 싶으면 숯을 조정해서 그릴이 식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백 명 가량 되는 손님들을 위해 고기를 굽다, 옆에서 놀라워하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저에게도 스테이크 한 점을 썰어 주었습니다. 안과 밖이 고르게 익었고, 육즙이 살짝 올라온 표면엔 윤기 나는 짙은 갈색 빛이 가득했습니다. 완벽하게 렌더링 된 지방은 입 안에서 부드럽게 씹히고 녹았습니다.



 


‘중불에서 3분간 굽다가 충분히 익혀지면 약불로 줄여 1분 더 익히세요’, ‘180도로 10분 예열한 오븐에 30분 구우세요.’ 온도와 시간의 좌표 위에 제 음식을 잘 위치시켜보려고 고민하던 저를, 셰프의 진지하고 안정된, 관찰하는 눈길이 일깨워주었습니다. 좋은 음식은 온도계와 타이머의 숫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변화를 관찰하는 오감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고기가 내는 소리, 보글보글이 부글부글이 되는 순간, 지금 필요한 것이 표면의 바삭함인지, 치즈가 녹아들 수 있는 시간인지. 알 단테로 변하길 기다려야 하는지, 면을 건져 소스와 버무려야 하는지, 냄새와 모양과 질감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기. 그 때 저는 굽고 삶고 익히고 데치고 끓이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불이란 이런 것이구나, 감을 잡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 적힌 메인 요리들은 이러한 주의 깊은 불의 향연 속에서 탄생한 것들입니다. 오감은 음식이 주는 신호를 알아차리고 반응합니다. 스테이크뿐만이 아니라 조개, 생선, 야채까지, 언제나 실험하고 개발하는 저희 불의 맛을 경험해보시길 바랍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