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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Jan 12. 2021

시간과 베토벤

베토벤이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오늘은 스물 두 마디를 연습한다. 첫 주제가 펼쳐지고 난 뒤 이어지는 마디들이다.



   계단을 내려오듯 1주제의 선율이 하강하고, 곧이어

‘시 레#-‘ 하고 2주제가 시작된다. 왼손은 조용히 자글자글, 오른손은 바이올린처럼 소리를 밀고 당긴다.

옥타브가 되어 같은 이야기는 다시 한번 반복된다. 이번엔 제2, 제3 바이올린들이 모인 듯 조금 커진 규모로 단호하게, 조금 더 긴박하게 현을 긋는다.


갑자기 ‘미파#솔#라시도#시라' 피리가 파랑새처럼 날개짓을 하고 북이 울린다. 퉁, 퉁퉁퉁퉁 퉁- 피리는 휘리리릭, 소리를 하늘로 올려 날리면서, 다시 바이올린들, 소리를 터뜨린다.

   스물 두 마디, 오늘은 피아노로 이 모든 악기들을 흉내낼 것이다.



   손가락을 풀어본다. 원하는 대로 왼손이 자글거릴 때까지 자글자글 자글자글. 선율을 흥얼거리면서 오른손으로 노래를 따라간다. 어떻게 하면 여기서 북의 소리가 더 잘 들리게 할까 여러 방법으로 화음을 눌러보고 속도를 입히기도 속도를 늦추기도 한다. 삼일 째 연습하는 꾸밈음은 이제야 자리를 잡아간다. 단호하고 강한 음 중간중간에 꽃봉우리가 터지듯 꽃잎의 꾸밈들이 산뜻하게 폭발한다.


스타카토와 포르티시모, 모든 악기들이 활을 위로 긁으며 떼었다가 그 다음 음에서 짙게 마찰시킨다. 나는 손끝으로 음들을 가볍게 움켜쥐었다가 곧 이은 화음에 손을 놓고 놀래키듯 단호하게 힘을 준다.



-



   본 템포에 맞게 처음부터 곡을 연주해보기로 한다. 되든 안되든 음악이 만들어진다. 손은 연주하고 귀는 듣는데, 점점 탄식이 커져간다, 입이 벌어진다. 곡이 시작되고 테마가 제시되고 도돌이표로 돌아왔다가, 이번에는 조를 바꾸고 다른 성부로 선율을 넘기고 왼손과 오른손이 자리를 바꾸고, 조명을 받으며 거장의 솔로를 선보였다가, 고조되었다가, 사그라든다. 조각처럼 세밀했던 각 마디들은 전체 연주의, 곡 서사의 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는다. 부분부분 지나쳤던 격정은 조율되고 흐름이, 음악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건반에서 손을 뗀다.


   방금 이 방을 채웠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본다. 악보의 음표와 그것을 누르는 나, 음들이 울렸던 시간. 오늘에서야 이 시간의 한 도막이 그 이외의, 일상의 시간들과 아주 다른 것임을 느낀다.

   내 앞에 있는 열 장짜리 악보를 바라본다. 베토벤이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소리? 악보? 형식? 시간?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간다. 말소리,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이 있다. 방 안에서 흐른 그 빽빽했던 한 도막에 비하면 너무 성긴 음들과 밀도 낮은 시간이 다음 순간으로 자리를 내어준다. 물을 따르고 물을 마신다. 방금 전 내가 있었던 곳과 여기는 너무도 다른 공간 같아 낯설다.


   방 안에서는 시간이 흘렀고 그 시간에는 단연코 아름다움이라는 수식을 붙일 수 있다. 아름다움 속에 나는 있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맴도는 음악을 떠올린다. 어둑한 밤, 달리는 발소리. 심장 박동처럼 고동치는 왼손, 질주하는 오른손.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펼쳐지는 건축적인 소리들의 드라마와, 이 형체 없는 고뇌, 교환, 조화.

이 음악에 대해 아름답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부족하고 불완전하다.


   내가 경험한 것은 일 초의 허투름도 없는,

모든 게 필연적인 시간이다. 시간이라는 형식의 완성된 형태다. 소리가 그 밖의 다른 경로로 진행될 수 있었을까? 그 밖의 다른 음이 들어갈 수 있었을까? 그러고도 이렇게 견고할 수 있었을까?

   베토벤이 만들어낸 시간의 형식적 완전성 속에 나는 잠시나마 머물렀던 것이었다. 시간은 이렇게도 흐를 수 있는 것이었다.




https://youtu.be/W0UrRWyIZ74

Claudio Arrau Beethoven Moonlight Sonata (full)


​https://youtu.be/352qLWqKN-​U

Murray Perahia Beethoven Moonlight Sonata (3rd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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