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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Feb 08. 2021

길버트와 어니스트

Oscar Wilde < The Critic as Artist >

   초저녁에 잠이 들어 일찍 깨어난 어느 새벽, 은은한 주황빛의 수면등 아래에서 나는 종이와 이미지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몸은 아직 지난 밤의 기운을 벗지 못해서 밍기적 밍기적. 눈 앞을 스쳐 지나가는 짧은 단락들을 읽고, 이미지들을 밀어 올린다.

   그러다 예기치 않게, 어떤 글 사이로 난 길에 들어섰다.


   좁고 어둑한 길 끝에 어느 건물이 있다. 덩굴무늬가 음각된 문고리를 당기자 사향과 낡은 나무의 냄새가 끼쳐왔다. 가까운 곳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리다 곧 멎더니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리가 있는 곳으로, 긴 복도를 지나 집 끄트머리에 있는 나선형 계단참에 들어섰다.

   계단을 오르자 시야가 은은하게 밝아왔다. 2층, 비스듬히 열린 문 틈으로 육각형의 거실이 보였다. 긴 직사각형 창은 그 거실의 사방을 두르고 있었고 한 구석에는 작은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거실 중앙에는 황갈색 벨벳 천에 깃털 장식이 수놓아져 있는 소파 세 개가 서로 마주보며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한 남자가 피아노에 기댄 채 서 있다. 검고 긴 장발 머리는 풍성해 윤기가 돌았고 빳빳한 흰 셔츠 주머니에는 은빛으로 번쩍이는 브로치 하나를 꽂았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에 선명하게 울렸다.

   그 방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는 소파에 눕다시피 앉아 발 받침대에 두 다리를 올려놓았다. 어깨 셔링과 팔목 술이 달린 얇은 코트를 입은 남자의 배 위에는 흑백의 얇은 잡지가 거꾸로 펼쳐져 있었다.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주의하면서 방문의 열린 틈을 비집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석상들이 일렬로 늘어선 벽난로 선반 옆에 섰다. 내 회색 복장은 벽의 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아노 쪽 남자는 입을 열었다.


-  회고록. 내가 회고록을 좋아한다는 걸 고백해야겠어.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형식이 좋아. 문학에서 그런 자기중심주의란 사랑스럽지.

   실제 삶에서도 자기중심주의가 매력이 없는 건 아니야. 사람들이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지루하지만 자기 이야기를 하면 거의 항상 재미있거든. 얘기가 지루해지기 시작할 때 그 입을 다물게만 할 수 있다면 아주 완벽하겠지만. 재미없어진 책을 닫아버리는 것처럼 쉽게.


   그의 목소리는 낮고 냉소적이었다. 뱉어지는 순간 바닥을 따라 옥구슬처럼 굴러갔다. 길버트- 라고 상대 남자는 그를 불렀다. 그는 먹잇감을 응시하는 뱀처럼 차갑고 침잠한 눈빛, 혹은 취한 듯 꿈꾸는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한 표정이 차올라 다른 하나 위에 드리웠다. 그는 허공을 보고 노래하듯 독백을 뱉었다가, 상대 남자- 어니스트라고 불리었다 -를 향해 불현듯 정제된 표정을 던지기도 했다. 그의 우람하고 꼿꼿한 몸은 연극 배우를 연상시켰다. 저물 녘 창가의 달빛은 넘쳐 흐르고 있었다.


-  너가 뭐라고 했었지?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그걸 하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했었나?

-  맞아. 바로 그 단순한 진실을 탐험했었지. 이제 내가 옳았다는 걸 너도 알겠니? 행동하는 자는 꼭두각시에 불과해. 묘사할 때 그는 시인이 되지. 모든 비밀은 거기에 있어.

   삶은 형식적으로 끔찍하게 불완전하다고.

   봐봐, 인생의 재앙들은 잘못된 방식으로 잘못된 사람들에게 일어나. 현실의 희극은 괴기하게 공포스럽고 현실의 비극은 쌓이면 결국 웃음극이 되지. 삶에 다가가려 하면 항상 상처를 입어. 우리는 너무 오래 겪거나, 너무 짧게 끝나 허무해하지.


-  삶이란 그럼 실패인거야?

-  예술적인 관점에서는 분명, 그래. 삶은 혼돈이야. 현실의 순교는 보잘것없고 그 영웅주의는 고결하지 않아. 하지만 예술은,

예술은 현실이라는 이 조악한 재료로부터 새로운 세계를, 평범한 눈이 보는 세상보다, 평범한 본성들이 자신들을 완성하려고 애쓰는 세상보다 더 경이롭고, 더 지속적이고, 더 진실한 세계를 빚어내지.




   나는 벽에 붙어 둘의 우아하고 고전적인 대화를 엿들었다. 대화의 리듬, 위트, 거만함은 부드러운 천처럼 밤 바람을 따라 내 피부에 나부꼈다. 진주알들은 바닥을 굴렀다.


-  향기로운 옷을 입고 수놓은 장막 뒤에 앉아 있는 아킬레우스, 사자의 심장을 지닌 프리아모스의 아들 헥토르. 유령인가? 이들은? 안개와 산의 영웅들인가? 노래 속의 그림자들인가? 아니, 이들은 실재해.

행동! 행동이란 게 뭐야? 그 힘을 행사하는 순간 죽어버리지. 현실에 대한 비굴한 순응일 뿐이야. 이 세상은 몽상가들을 위해서, 노래하는 시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져.


   높고, 귀족적인, 그 찰나의 조각들을 나는 주머니에 한 줌 담고 그 방을 빠져 나왔다. 어느덧 하늘은 연붉게 물들었다. 방에는 수채화처럼 오전의 색이 칠해지고 있다. 나는 진주를 꺼내 책상 위에 일렬로 놓는다.




   여느 새벽, 잠결에 그 방에 찾아가면 두 남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름다움에 대하여, 예술, 비평에 대하여, 고결하고 영속적인 것들에 대하여. 혹은 때로 그들은 저녁식사- 멧새구이와 샹베르탱-를 하고 있었고, 혹은 길버트는 피아노 연주를 한다. 나는 내 자리, 벽난로 옆 회색 벽에 붙어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고 흐르는 그 목소리에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리하여 진주알들은 일렬로 놓여 있다. 방에 돌아오면 나는 창가의 빛에 그 진주를 이리 저리 비춰본다. 노랫가락처럼 우아한 대화와 마술적인 밤이 공기 중에 걸려 있다.







대화: Oscar Wilde <The Critic as Artist>

이미지: Aubrey Beards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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