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도그림 Sep 26. 2022

첼로적인 감각

   말의 꼬리 털로 만들어진 활이 굵고 팽팽한 금속성의 현을 긁으며 내는 소리, 마찰이 소리가 되게끔 끈적이는 저항을 주는 송진, 진동이 머물고 증폭될 수 있게 속이 빈 곡선의 나무 몸체.

   이러한 '현악기'들은 예민하고 고고하고 우아하고 깊은 소리를 낸다. 소리가 물이라면, 클래식 기타는 잔잔이 일렁이는 수면 같고 첼로는 굵고 부드러운 강줄기 같다. 바이올린은 얼음조각처럼 청아하고 뾰족하다. 현을 튕기면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들 같고, 약하게 그으면 히스테리적인 정신이 내는 작고 얇은, 감각의 섬모들이 곤두서 있는 쉰 비명소리 같다. 얼마나 짙게 긁느냐에 따라 한 음에서도 소리는 여러 감정과 태도를 보인다.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작은 음악회에 갔다. 현악 오케스트라와 솔리스트의 협연으로 이탈리아의 고전주의 작곡가 보케리니의 몇 레파토리를 선보인다. 단편들의 모음으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 연주의 첫 세션이 끝나고 두 번째 순서인 첼로 협주곡의 차례가 온다. 솔로 첼리스트가 무대 앞 의자에 앉아 두 팔을 굽어 첼로를 안는다.

   기대와 달리 시작은 삐걱거리는 듯하다. 첼로의 독주는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음향 곁에서 겉돈다. 협주곡의 매력인 개인과 집단, 갈등과 통합의 변증법은 그다지 들리지 않고, 각 악기의 선율과 전체의 대위, 화성이 조화없이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오케스트라의 볼륨은 너무 크고 제 1 바이올린은 너무 돋보이고, 그에 비해 첼리스트가 앉은 자리는 그의 소리를 양각으로 돌출되게 하기보다는 납작하게, 오케스트라 속으로 휘말리게, 그래서 잘 들리지 않게 만들어버린다. 그렇지만 악장이 전개될수록 소리는 자리를 잡아간다. 불편한 듯 어물쩍거리며 오케스트라를 노려보는 듯한 첼로도 1악장 후반 쯤 들어서서는 이제 자기를 찾은 듯이 전체 속에서 율동적이다.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다. 숲 속에 들어온 듯, 어스름 나무 위의 새들처럼 오케스트라는 지저귀다가 속삭이다가 날고 앉으며 쉼없이 움직이고, 그 속에서 연주자는 첼로 하나로 자기 목소리를 내다. 한 음 한 음 농도를 바꾸어가며 질감만으로 내용을 전달하다가도 활을 위 아래로 들었다 내리면 소리는 모든 현들을 긁는 파도같고 격정적인 아르페지오가 된다.

   첼로 소리가 저 연주자의 언어라면, 소리의 단어와 선율의 구문을 통해 연주자는 무엇을 표현하고 있을까? 이러한 말하기를 통해 저 연주자는 어떤 감각으로 세상을, 일상을, 자신의 감정을 느낄까? 이 감각이 축적되어 저 연주자는 어떤 사람이 될까?

   예컨데 그에게 절망의 느낌은 '절망'이라는 단어와 그것이 함축하는 여러 의미이기 이전에 음들의 미적인 움직임이 되리라 짐작해본다. 사건과 감정은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의 판단 이전에 우선적으로 그저 소리의 현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될까. 그리하여 판단하기보다는 그대로 표현하고 느끼고 받아들이게 될까. 음악의 아름다움 속에서 사건도 감정도 점차 정당화될지도 모른다. 지금의 프레이즈를 내용에 대응시켜보려고 한다. 하지만 첼로의 소리를 언어로 번역하는 데 한계가 있듯, 첼로적인 시선, 첼로적인 감각은 그저 듣는 수밖에, 온전히 해석되지 않는 소리의 에피소드들, 그 질감 속에 머물며 느끼는 수밖에 없다.

   첼리스트가 독주가 나온다. 카덴차는 점점 고조되고, 그가 마지막 한 마디를 그을 때 나는 감고 있었던 눈을 떴다. 앞에 연주자가 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현악기의 몸체처럼 미간에 곡선의 주름을 지운 채, 눈을 내리깔고 팔과 손가락의 운동이 만들어내는 소리에 집중하는 한 사람이 있다. 활로 공중에 소리의 궤적을 그리며 마지막 음을 올려보낸 뒤, 그의 시선도 소리를 따라 위로 향한다. 감격과 울분, 안도와 희열이 뒤섞인 어떤 표정이 숨표의 길이만큼 일시적으로 떠오르는데, 소리가 움켜 주름지운 얼굴이다. 무대 위에는 물질화된 그 음악의 프레이즈가, 그것이 나오기까지의 삶과 시간들이 바로크 조각처럼 서 있다.


   자신의 일부이자 연장선으로서의 첼로. 악기와 한 몸이 된 사람들. 모두가 자기 주관에 떠오른, 그래서 서로 다른 세상을 살듯이, 이들에게 세상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르리라. 소리의 위계없는 언어와 함께하는 삶, 악기가 열어주는 고유의 감각들에 대해 생각한다. 바이올린과도 기타와도 다른 첼로, 첼로와도 기타와도 다른 바이올린, 악기들의 서로 다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https://youtu.be/RR5NrizkGs8

L.Boccherini: Cello Concerto in G major, G.48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