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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전시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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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Jun 01. 2021

SF전시, 예술이 상상하는 미래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SF2021: 판타지 오디세이≫ 리뷰


  오랫동안 저 세계, 상상의 공간, 환상과 가상에 관심을 가져왔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세계에 산다면 어떨까? 그곳 사람들은 무엇을 입고, 먹고, 어떤 체제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갈까? 이런 공상적인 질문을 줄곧 품곤 했었다.

  요 근래 들어 이 취향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있다. 구병모, 배명훈, 듀나 등을 필두로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 있는 서사들이 문학계에서도 대두되고 있고, 한국 영화도 우주와 미래로 테마를 확장해나가고 있다. 미술에서도 반가운 움직임이 보인다. SF에 대한 전시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오늘은 그 중 하나로 현재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진행중인 ≪SF2021: 판타지 오디세이≫ 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전시는 SF 소설가, 시각예술가, 음악가들의 작업을 통해 국내외 SF의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특히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 제작된 작업들이 많은데, 참여 작가들의 단독 작업뿐 아니라 예술 부문간 경계를 망라하며 협업한 새로운 작품들도 있다. 본 글에서는 작품을 매체에 따라 ‘텍스트’, ‘이미지’, ‘사운드’로 크게 나누고, 전시에서 드러나는 SF적 상상의 현 위치가 어떠한지를 돌아보고자 한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SF가 무엇인지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SF는 과학 소설 (Science Fiction)의 줄임말로, 과학적 사실이나 가설을 바탕으로 만든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말한다.

  이 전시에서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SF의 정의에 ‘현실’이라는 요소를 끌어들인다. 전시는 SF와 판타지를 단순히 과학기술에서 출발한 픽션이나 허구적이고 가상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SF를 “현재 속에 그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오지 않은 것. 그러므로 판타지의 형태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정의한다. SF와 판타지의 세계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바탕을 두고 상정된 세계이기 때문에, 이들은 현실을 바라보는 창이 된다.


그렇다면 SF와 판타지가 현실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가? 현실을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앞으로 보게 될 SF작업들은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는가? 1, 2층의 초입에 전시되는 두 텍스트 작업은 이 핵심적인 질문에 답을 하고 있다.

 


  김보영의 SF연대기 <세계를 바꾸는 문장들>세계SF문학을 중심으로 SF가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지 6가지로 나누어 제시한다. ‘장밋빛 전망, 경고, 사회비판, 소외된 자들, 모험, 새로운 세상’이라는 키워드가 꼽힌다. 이를 통해 이야기하는 바를 정리하자면 이런 것이다. SF는 과학기술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기도 하고, 미래의 파국을 경고하기도 한다. 또 현재의 문제를 SF적 상상을 통해 완충적으로 비판하기도 하고 대안적인 사회체제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현재와 미래에 대한 뚜렷한 비평적 발언이 없더라도 언제 어딘가에는 있을 법한, 논리적이고 아름다운 상상을 제공하면서 독자들이 꿈꾸고 모험할 수 있게 한다. 김보영은 각각의 키워드와 연계되는 세계SF문학 작품들을 선정하고, 전시장에서는 키워드별로 소설의 한 구절이 설명과 함께 제시된다.




  한편 2층 첫 작업인 정소연의 동시대 SF의 화두 <변화하는 세계의 감각>은 지금 한국에서 쓰이고 있는 SF문학에 초점을 맞추었다. 여기에서는 SF소설을 이들이 다루는 동시대 사회문제와 연결지어서 보여준다. ‘페미니즘, 생태, 아동, 정상성, 인간성, 사회적 기억, 생활공동체, 전염병대유행, 새로운 기준’의 아홉 가지 주제와 이에 해당하는 소설의 한 구절을 꼽혔다. SF와 판타지가 허무맹랑한 가상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비판적 틀을 제공하고,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힘을 가진 장르라는 것을 다시금 보여준다.  


  이 텍스트 작업들은 단독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각각 이 작업을 재해석한 디지털 페인팅과 병치된다.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하는 구현성과 람한은 제시된 소설을 한 장면으로 응축시켜 보여준다. 그림 자체를 보고 상상할 수도, 소설의 대목과 연결지어 볼 수도 있어 경험이 배가된다.



  이와 더불어 전시에는 세 소설이 더 등장한다. 여덟 개의 호흡으로 나누어져 전시장 벽에 붙어 있는 듀나의 <나의 도시에서>라는 단편과, 롬버스의 작업으로 청각화되는 배명훈의 <징후>라는 소설이다. 관람객들이 릴레이 소설 식으로 써 내려간 단편들을 정지돈이 종합해 추후 공개되는 또 하나의 소설도 있다. 이 글들은 미술관에서의 경험을 전시 전후로 확장한다.





  한편  영상, 회화, 설치 등 다양한 매체로 SF이미지들도 만나볼 수 있다. 생명공학, 기계, 디지털환경, 우주, 통신 등 다양한 주제가 다루어지며 작업마다 그 상상력이 다르다. 전시 초반에 보여지는 루시 매크래의 영상들은 다소 디스토피아적인 미래 시나리오를 보여준다. 자신이 배양한 신체 젤라틴 조직을 먹는 인물에 대한 단편 <제작자>는 인체를 설계하고, 복제하고 먹는 것에 대한 상상을 이미지화한다. 점액질의 상상이 화면을 채운다. 액체와 고체 경계에 있는 젤라틴, 비닐과 아크릴 같은 반투명 소재들, 생명의 배양을 위한 액체, 습기, 온도, 부풀어오름, 이빨 사이에서 떫게 부스러질 것 같은 형광색 식품들이 감각을 몰입시킨다.

 


첨단 과학과 포스트 아포칼립스 사이에 있는 미래 이미지들은 또 다른 작업 <고립연구소>에서 강박적이고 정제된 형태로 나타난다. 피부색 옷을 입고 갑각류 같은 보호장비를 찬 인물은 가로로 누워있는 원형 유리 쳇바퀴에서 돌며 자신의 신체를 적응시킨다. 카메라는 광활한 폐건물을 부감하고, 정제된 대칭 구도들은 이 사회의 폐쇄성을 강화한다.


 




   장종완의 회화작업은 과학기술을 염두한 SF 보다는 현실에 없는 것을 드러내며 상상을 자극하는 판타지이다. 이 회화 속 환상 세계는 몇몇 동화를 연상시키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빗겨나 있어 새롭다. 어둑히 푸른 숲 한 골짜기에 놓인 대형 분홍 구두나 리코더를 쥐고 있는 나무 밑둥,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민들레 뿌리와 꽃씨를 들여다본다. 그림 속 대칭적이고 율동적인 선들, 형태, 대칭, 운동성과 그 배후에 묻어나는 독특한 상상력과 유머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즐거워진다.

 




  한편 김희천은 <멈블>에서 디지털 가상 기술이 발전한 메타버스로서의 미래를 보여준다. 이곳에서는 모션 맵핑 기술을 통해 현실에 있는 사용자의 움직임이 가상 공간으로 이전되고,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과 동물들은 이 기술을 이용해 움직임을 연습한다. 영상의 많은 부분은 3D 컴퓨터 그래픽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환상적 효과를 주기 위한 그래픽가 아니라 CG로서의 세계이다. 가상과 현실, 꿈으로 이루어진 여러 갈래의 내러티브가 존재론적인 위계를 허물며 펼쳐진다.

 







  전시에서는 사운드 작업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작업들이 들려주는 SF적 음향은 어떤 것일까?


  최윤의 <둠즈데이 오디오>는 ARS가 중심을 이루는 작업이다. 1층 전시장에서 모서리를 돌면 한 전광판과 마주하는데 촌스러운 글씨로 ‘둠즈데이 오디오’라고 쓰여 있다. 이게 작업의 끝인가 하며 잘 보니 아래에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전화를 걸어본다. “배에 오르시겠습니까? 그렇다면 1부터 0까지 빠짐없이 수행하세요.” 라는 말을 시작으로 관객은 번호를 누르며 목소리에 응답하게 된다. 자동응답기 남녀의 목소리는 여러 지시를 한다. 해적판이나 사이비같이 미심쩍고 조악하고 맥락 없는 말들이다. 결국 둠즈데이에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소리가 불러일으키는 인상만은 선명하다.


 



  롬버스의 <우호적인 자장가> 에서도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음향이 흘러나온다. 헤드셋을 끼니 무언가가 중얼거린다. 음소들이 끊어진 채로 뱉어진다. 꿈 같기도 하고 의식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웅얼거림 같기도 하다. 롬버스의 작업이 영혼이나 의식과의 소통을 연상시킨다면 그 건너에는 지구와 외부 혜성의 소통을 담은 양아치의 <태양계>가 있다. 두개의 달 이미지 앞에 비치된 휴대용 라디오처럼 보이는 구식 통신 장비를 통해 관람객들은 소리를 수신할 수 있다. 지구에서 송출된 소리가 혜성에 닿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에서 출발해, 관람객들은 주파수를 맞추고 전파에 실린 전자음, 잡음, 현악 중주 같은 옛 소리들을 듣는다.

 





   ≪SF2021: 판타지 오디세이≫는 한국을 중심으로 국내외 SF의 현좌표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였다. 동시대 문화예술이 과학기술과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또 이들이 현실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구체적인 작업과 적절한 이론적 설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텍스트와 작품 모두 많은 전시였지만 런닝타임이 적절하고 보여주는 방식이 다양해 지치지 않고 한 방문에 충분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텍스트 작업은 온라인으로도 볼 수 있으니 전시 관람전에 미리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전시는 6월 6일까지 북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된다. 아래에 2000년대 웹아트를 연상시키는 홈페이지의 링크를 올린다. 이곳에서 전시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http://www.fantasy-odysse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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