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전시공간 소개 시리즈
미술관에 대해 말하려면 무엇보다도 소격동과 삼청동을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경복궁 오른편에 위치한 이 고즈넉한 동네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비롯해 아트선재센터, 국제갤러리, 학고재 갤러리, 아라리오 갤러리 등 미술관과 갤러리가 밀집해 있다. 푸르고 깨끗한 거리, 한옥과 높이를 맞춘 특색 있는 건물들, 인근 북촌의 골목골목, 청와대 앞 돌담길. 마음이 차분해지고 맑아지는 지역이다.
그 중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지역의 대표 랜드마크로서 자리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다. 경복궁 담장을 마주보고 옛 기무사 건물인 붉은 벽돌 건축과, 미색 테라코타 외벽의 현대식 건물이 나란히 서 있다. 그 뒤편에 있는 전통한옥 양식의 문화재 종친부까지 다 미술관의 일부이다. 수평적으로 펼쳐져 있는 미술관은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 미로같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외부를 걷다보면 미술관 건축이 북촌, 경복궁과 교차하면서 걸음마다 달라지는 새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미술을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이름은 들어봤을 법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이 시리즈를 시작하는 것은, 유명하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데 비해 미술관의 세부는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몇 년 단위로 기획되어 매년 이어지는 전시 시리즈들이나, 숨어 있는 프로그램과 시설들에 대해 알고 가면 관람 경험이 배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과천관, 덕수궁관, 청주관과 더불어 미술관의 분관을 이루고 있다. 같은 기관을 여러 지역에 두고 있는 것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각 분관마다 특화된 분야가 다르고, 이에 따라 기획하는 전시, 보여주는 작품의 양식과 시대도 다르다. 한국 근대미술을 보려면 덕수궁관을, 건축, 공예, 판화, 디자인 관련 작품들을 보고 싶다면 과천관을 가야하고, 수집한 미술품들을 어떻게 보관하는지 알고 싶다면 청주관을 방문해야 한다.
2013년에 개관한 서울관은 동시대미술, 다원예술, 영상, 퍼포먼스를 다룬다. 지금 이 시대의 감각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작가들이 현대의 기술 미디어 환경 속에서 만들어내는 작품 대부분은 서울관에 전시되는 것이다. 코로나19에 대한 전시 《재난과 치유》 나 반려견에 대해 다루는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 처럼 동시대 사회에 반응하는 전시들이 대표적이다.
매년 초에 국립현대미술관의 한 해 프로그램 계획이 나온다. 매 해 그 시기와 사회 상황 속에서 다루는 주제가 달라지지만, 보다 긴 호흡을 가지고 기획되는 전시들이 있다. 이 전시들은 시리즈를 이루며 매년 혹은 격년에 한 번씩 진행된다.
그 중 대표적으로 《올해의 작가상》, 현대차가 후원하는 《MMCA 현대차 시리즈》 와 《프로젝트 해시태그》 그리고 《아시아 기획전》 시리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각각 개별적으로 관람하곤 했던 전시들이 어떤 맥락 속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관에서는 매해 말 SBS 문화재단과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전시이자 수상제도 《올해의 작가상》 을 연다. “한국현대미술의 역동성과 비젼 그리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작가들을 지원, 육성한다는 취지로 2012년 시작해 현재 10회를 앞두고 있다. 전시는 심사를 통해 작가 네 명(혹은 팀)을 선발하고, 이들에게 각각 4000 만 원의 지원금을 주며 만들어진다. 이 전시를 바탕으로 2 차 심사가 이루어져 한 명을 최종 ‘올해의 작가’로 선발한다.
여태까지 수상자로는 이슬기(2020), 이주요(2019), 정은영(2018), 송상희(2017) 등이 있어 왔다. 매년 화제가 되고 많은 관람객들이 방문하는 전시다.
전시를 둘러싼 몇몇 인상적인 해프닝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2015년 수상자 오인환의 ‘가짜 작가’ 논란이 있었다. 오인환은 올해의 작가상 개막식과 시상식, 인터뷰 영상에서 ‘아티스트’처럼 생긴 배우를 고용해 작가 자신을 연기하도록 했다. 배우는 작가 대신 능숙하게 작품 설명을 하고 공식석상에 임했는데, 이는 상반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 해프닝을 이전 ‘제도비판’ 작업의 연장선으로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작품보다 작가를 앞세우는 행태에 대한 비판을 전시라는 프레임 밖으로 가져온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수상자의 기본 도리를 벗어났다는 비판도 있었다.
한편 2020년에는 리얼돌 산업을 주제로 한 정윤석 작가의 <내일>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중국 공장과 일본 이용자를 넘나들며 섹스돌의 생산과 소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정윤석 작가의 작업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 상품화한다는 비판이 일었다. SNS상에서의 논란은 여성의당의 성명서 발표로도 이어졌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정윤석 작가의 작업은 ‘당면 사회적 이슈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다루는 다큐멘터리이며, 예술작품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입장을 표명했지만 이 작품이 포르노그라피인지, 예술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예술 작품에 대한 이해와 감상이 다양한 만큼 작품에 대한 의견도 일관되지 않다. 그럼에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미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담론을 확장시키고자 한다는 본래의 의도는 실현되는 듯하다. 좋은 작가를 지지, 지원한다는 수상제도로서의 취지를 넘어서 미술사를 만들어나가는 미술관의 선택이 대중적인 설득력을 지닐 수 있도록 소통하는 장으로서 《올해의 작가상》은 작동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미술이 무슨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지, 한국과 세계가 활발하게 교류하는 지금 한국작가들이 보여주는 조형미는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그 단면을 확인할 수 있는 전시이다. 올해의 작가상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매회 후보자, 수상자의 작품 이미지와 이력, 작가론 비평, 인터뷰 영상 등 풍부한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어떤 작업을 해왔고 왜 주목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상세한 비평문도 읽어볼 수 있다.
한편 국립현대미술관은 현대자동차와 협력해 《MMCA 현대차 시리즈》 를 진행하고 있다. 매년 하반기 열리는 이 전시는 매년 1 명의 작가를 선정해 10 년간 최대90 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전시를 지원하는 프로젝트로, 세계적인 작가들이 이 기획하에 전시를 열었다. 이불, 안규원, 김수자, 최정화, 박찬경, 양혜규 등 국내외 중요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전시하는 작가들이다. 매번 회고전을 방불케 하는 규모로 다양한 작업을 선보이는데, 이런 방대한 작업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이다. 한국현대미술의 대표격으로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만나보고 싶다면 방문해야 할 전시다.
이 전시를 후원하는 현대자동차는 현대미술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기업 중 하나이다. 문화예술의 저변을 확대하고, 젊고 혁신적인 기업 이미지를 유치하며 예술과 기술이 융합된 창의적 시도들을 지원하기 위해 다양한 기관을 후원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뿐만 아니라 영국의 테이트모던, 미국 LA카운티미술관 (LACMA), 블룸버그통신과 협약을 맺고 전시와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앞서 보았던 《MMCA 현대차 시리즈》가 중진작가가 도약할 수 있는 무대가 된다면, 《프로젝트 해시태그》는 젊은 창작자를 지원하는 전시이다. 이 프로젝트는 매년 공모를 통해 서로 다른 예술 분야의 창작자로 이루어진 두 팀을 선발하고 창작지원금과 전시 기회를 준다. “프로젝트 해시태그는 회화, 조각, 뉴미디어, 영화, 디자인, 건축 등의 전통적 시각‧시간 예술 분야뿐 아니라 음악, 요리, 현대무용, 언어학, 생물학, 물리학 등 시각-플랫폼에서 벗어난 분야들과 시, 소설, 하이퍼텍스트 등 시간-플랫폼에서 벗어난 분야들의 자유로운 만남을 환영합니다.” 라고 공모 모집글은 설명하고 있는데, 이처럼 선정된 팀은 미술의 영역을 넘어 교류한다.
지난 해 전시에서는 ‘강남이란 어떤 곳인가’라는 질문을 다루는 ‘강남버그’와, 종로3가를 퀴어적 시선에서 기록하는 ‘서울퀴어콜렉티브’가 건축, 도시개발, 역사, 젠더 등이 교차하는 작업을 보여주었다. 소위 ‘융합’, ‘뉴미디어’, ‘다원예술’ 이라 불리우는 작품들이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볼만한 전시이다.
그 외에도 아시아 현대미술을 다루는 《아시아 기획전》도 진행되어 왔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문화와 역사적 굴곡을 공유하면서도 그 세부는 다른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예술이 궁금하다면 여기서 확인해볼 수 있다. 아시아의 정체성에 대해 새로이 그려보고자 하는 전시가 2018년에 있었고, 2020년에는 ‘가족’이라는 키워드로 아시아에서 집단과 연대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제외하면 국내에서 아시아 미술을 볼 기회가 많지 않기에 한번 가볼 만한 전시이다.
한편 전시 외에도 수시로 여러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필름앤비디오’ 에서는 전시와 연계된 예술 영화를 상영하는데 전시 관람권만 있으면 무료로 볼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이벤트와 퍼포먼스, 심포지움, 작가와의 대화 같은 프로그램도 매달 진행된다. 반려견과 함께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과 같이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고, 미니멀리즘 댄스의 선구자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가 직접 선보이는 무대처럼 국내외 예술가들의 공연도 무료로 진행된다. 전시를 보고 관심이 가는 작가가 있다면 아티스트 토크에도 참여할 수 있다. 보다 심도있고 학술적인 세미나나 심포지움도 미리 예약하면 들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나만 알고 싶은 곳, 국립현대미술관 도서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미술관 주변을 걷다 보면 한눈에 보이기에 숨은 명소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나치며 보았더라도 대부분 들어오지 않는 곳이다. ‘디지털도서관/ 디지털아카이브’ 라고 불리는 이 곳에는 미술과 관련된 많은 서적들이 있고, 국내외 미술 잡지, 전시 도록 등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소격동 한복판에 고즈넉하고 조용하게 머물며 책을 읽고 싶다면 여기만한 곳이 없다. 큰 유리창으로 빛이 환하게 들어오고, 푸른 잔디와 미술관 건물을 경관삼아 볼 수 있다.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자유롭게 이용 가능하다. (지금은 코로나 관계로 사전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다)
쓰다 보니 글이 길어져 카페와 맛집에 대한 이야기는 추후 글을 위해 남겨두겠다. 일단은 미술관 안에 테라로사 커피와 오설록 티하우스가 있다는 점만 간단하게 언급하려 한다. 프렌차이즈이지만, 예술적이고 열려 있는 미술관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곳이다.
다음 글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 뒤편에 맞닿아 자리한 아트선재센터로 가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