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전시의 맛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도그림 Dec 16. 2022

최우람의 우아한 기계들


꽃 한 송이와 마주한다. 천천히 개화되고 있다. 오므라들었던 꽃잎이 느리게 펴지고, 꽃의 중심부가 호흡하듯이 서서히 밝아온다. 한지처럼 부드러운 질감의 꽃잎들은 가닥가닥 방호복 천의 섬유질을 늘어뜨리고 있다. 몸체보다 큰 꽃, 여기 들어서기 전부터 있어 왔고, 그 후에도 언제나 이 모퉁이를 돈 자를 느린 움직임으로 마주할 이 생명체 앞에서 신기함과 숙연함을 느끼면서, 거리를 두고 이 우아한 동작을 지켜본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진행 중인 최우람 작가의 전시 <작은 방주>에서 이 기계 생명체 ‘하나’는 최우람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이 조각을 지나 크고 검은 다음 전시실로 들어서면 한 가운데 거대한 배 모양의 설치물이 있고, 닻과 같은 배의 부분들과 설계 스케치, 그리고 이 설치물과 시각적, 내용적으로 공명하는 조형물들이 그 주위 펼쳐지고 있다. 그 중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자 바로 앞에서 일렁이고 있는‘무한 공간’은 시선을 사로잡는다. 키 높이의 타원형 유리 공간 안에 거울들이 조명을 굴절, 반사시켜 마치 빛의 굴처럼 매혹하듯 꼬리치는데, 이를 바라보다 보면 이러한 환상적인 기계들을 만든 이는 누구인지,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해진다.

현대차가 매년 한 명의 현대미술작가를 후원해 전시를 올리는 MMCA 현대차시리즈의 전시작가 최우람은 1970년 생 조각가이다. 그는 ‘Urbanus’, ‘Arbor Deus Pennatus’ 같은 이름의 기계 생명체들과 이들을 둘러싼 공상과학적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며 작품세계를 쌓아갔고, 그의 작업은 로봇아트, 키네틱아트로 불리우며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중앙대 조소과에서 공부하던 대학시절, 청계천 주물 공장과 철공소에서 살다시피 하며 어깨 너머로 기계의 작동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졸업 후 로봇 회사에서 일을 하기도 한 그는 이제 로봇 공학, 생물학, 고고학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력해 작품을 만든다. 주제와 스토리 구성, 스케치, 설계, 움직임 시뮬레이션, 기계 부품 제작 조립까지 한 아이디어가 물리적인 존재가 되는데 1년 남짓한 시간을 보내면서, 해마다 그의 연구소에서는 기계 생명체들을 태어난다.


발전된 기술을 이용하고 기술의 효과에 대해 성찰하며 예술은 언제나 기술과 발을 같이 했었다. 원근법의 발명, 카메라의 등장과 인상주의 화풍, 차원에 대한 논의와 입체주의, 텔레비전과 커뮤니케이션 기술에 반응한 백남준 등의 초기 미디어 아트, 인공지능을 활용해 텍스트를 만들고 이미지를 조합하는 현대의 작업들 등 그 예시는 수없이 많다. 최우람의 작업은 기계공학의 발달과 함께하는 예술의 현대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이 전시를 대표하는 배 설치 작품 <작은 방주>는 30분마다 한번씩 그 몸을 열어보이며 퍼포먼스를 펼친다. 방주 상단 등대의 헤드라이트가 켜지고 금속성 소음이 늘어져 일렁이는 것을 시작으로 택배 상자를 칠해 만든 70개의 노들, 혹은 곤충의 다리처럼 보이는 이 판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물살 같다가, 날개 같다가, 촉수 같은 이 생명체의 움직임, 기계음 속에서 금속의 차가운 반짝거림, 이 우아한 형상을 지켜본다.

타원형 배 두 중심점에 앉아 두 선장은 허공을 향해 팔을 뻗었는데, 그 의지와 이들이 감내하는 이 항해는 숭고하게 보인다. 이 방주-생명체의 움직임들이 그들의 내면이 외화된 것인양, 겉보기에는 한낱 판자 조형물일 뿐이지만 그들이 항해의 이야기를 펼쳐놓기 시작하면 무엇보다도 장엄한 사람들이라는 듯이. 이들은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 선각자나 숨겨진 영웅인가? 하지만 방주 책임자인 두 선장은 한 목적지로 나아가는 대신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해 앉아 있고, 어둠을 밝히는 듯 보이던 등대는 또한 관람객들을 감시하는 듯하다. 뒷펀에서 재생되고 있는 끝없이 열리는 문들의 영상을 바라보며 이 항해에 목적지도, 끝도 없음을 예감한다.


퍼포먼스가 마무리되어 다리들은 접히고, 저 방주-곤충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도로 정지해 있는데, 이 움직임과 마주침은 기억 속에 잔여하고 있다. 하나의 조형적인 은유로서 이 방주가 감각의 일부를 형성한다. 어떤 순간들, 사건들, 사람들을 오늘의 퍼포먼스 같다고 생각할 날이 올 것임을 직감한다.


‘예술이란 감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라고 예술철학의 한 분파는 말한다. 예술은 의식적인 사유 이전에 몸에 일어나는 느낌들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감각이 생각의 재료이자 행동의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술은 비단 현실의 재현, 반영, 복제물이 아닌, 현실을 이루는 또 하나의 존재로서 이를 보는 감상자에게 영향을 준다. 최우람은 SF적인 상상을 물리적인 실체로 만들면서 새로운 감각을 창조한다. 그의 작업 속에서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할 법한 상상들은 조각이라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실체로 우리 앞에 주어진다. 입체적으로 구현된 이 미적인 향유의 대상, 감상자들은 존재감이 충만한 이들과 만난다.  


“당신은 누구인가?” 하고 묻는 한 인터뷰에서 최우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각가다.”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조각가란 무엇인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은 형상을 통해 본인의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이 조각들은 어떤 마음을 말하는가? 감상자 개개인에게 이들은 어떤 인상과 감상을 남기고 그리하여 어떻게 달리 생각하도록 하는가? 최우람의 기계 생명체들은 전시장 한 모퉁이에서, 도시의 어떤 그늘 속에서, 혹은 감상자들의 기억과 상상 속에서 느리게 빛을 발하고 소리를 내며 숨쉬고 있다. 전시를 본 우리는 이제 이들이 존재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세계로 들어섰다.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2023년 2월 26일까지 .

매거진의 이전글 [01] 소격동, 삼청동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