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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세 외할머니는 머리카락이 검다
by
집녀
Jan 23. 2022
새카만 외할머니의 머리카락
외할머니는 머리카락이 검다.
1927년생, 무려 96살이신데도 그렇다.
앞머리 부분에 흰머리가 반 정도 올라온 것 말고(그렇게 올라온 흰머리는 신기하게도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뒷머리만 보면 새카맣다.
그런 외할머니가 부럽다.
그 좋은 유전자를 내게도 넘겨줬으면 좋았을 텐데,
한 때는 나도 외할머니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줄 알았다
동안에 속하고 흰머리도 동년배들에 비해서 거의 없었다.
흰머리라는 세월은 나를 살짝 비켜가는 듯했다.
아니었다.
할머니의 유전자는 나를 비켜가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누구보다 건강하셨다.
여든이 넘어서까지 가족들의 김장을 챙기셨고,
아흔이 넘어서도 줄넘기는 거뜬히 하시고
동네 뒷산 등산은 문제없으셨다.
하도 활동적이어서 가족들이 걱정할 정도였다.
외할머니는 통뼈다.
손목을 잡아보면 뼈가 반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무쇠 팔목.
외할머니는 내게 건강의 상징으로
내가 닮고자 하는 모습이었다.
2021년 봄이 한창일 때
외할머니가 넘어지셨다.
집안에서 옷을 갈아입다 넘어지셨고 뼈에 금이 갔다.
그나마 뼈가 단단해서 이 정도에 그쳤다고 의사는 말했다.
병원생활을 단 한 번도 한 적 없던 외할머니는
처음으로 입원이라는 것을 하게 됐다.
외할머니는 병원생활에 공포를 느끼셨고
밤마다 집으로 보내달라고 소리를 지르셨다.
움직이지 마라고 채워준 고정장치마저
갑갑하다며 떼내기 일쑤였다.
결국 외할머니는 집으로 돌아오셨다.
지금은 외삼촌 세 명이 외갓집에서 돌아가며 당번을 서고 계신다.
외할머니는 참 복이 많다.
요즘 같은 시절에 그래도 챙겨줄 아들들이 지척에 살고 있으니
그만한 복이 어딨나 싶다.
하지만 아들들이 못하는 것이 있다.
목욕과 미용,
아들들에 비해 멀리 있는 딸 들은
방문할 때마다 꼭 머리를 다듬거나 목욕을 해드린다.
며느리가 해 주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계시는 외할머니는
딸들이 만지면 유독 투정이 심하다.
편해서 그러리라, 나는 그런 투정마저 사랑스럽다.
갈수록 늘어나는 엄마의 기술 외할머니 미용은 엄마 담당이다.
외할머니는 집에 돌아오신 후 한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식사도 잘 못하셨다.
건강하던 외할머니의 몸은 비쩍 말라가기 시작했다.
그 잘 드시던 밥도 속이 아프다고 거부하셨다.
외할머니의 눈동자는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안쓰러울 정도로 작아진 외할머니
못 먹는 이유는 위가 안 좋아서였다.
허리 치료를 위해 먹던 약이 위에 부담이 갔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무조건 드시라고 다그쳤다니...
치료 이후 외할머니는 잘 드신다.
달력에 그려진 큰 동그라미는 그날 큰 볼일을 크게
본 것이고,
작은 동그라미는 조금
본 것이다.
하지만 매일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외할머니는 입맛이 돌아왔고 눈빛도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처음 외할머니가 쓰러졌다고 했을 때 펑펑 울었
다.
예전 건강했던 외할머니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물론 예전처럼 걸어 다니시지는 못한다.
하지만 건강하시다.
걷지 못하고 기어 다니지만 화장실 정도는 혼잣 걸음도 하신다.
그리고 항상 나만 보면 얘기했던
"시집 안 가고 싶나! 이 바보야"
를 외치신다
이제 남들은 눈치가 보여 더 이상 내게 물어보지 않는 말을,
외할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물으시는 것이다.
이젠 외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시집갈 거니까 내 결혼식 때 참석하려면 벌떡 일어나야 해!"
그리고 나한테 계속 시집가라고
바보라고 말해 줘야 해!
나는 검은 머리 외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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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파이어족을 꿈꾸지만 현실은 22년차 직장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행과 걷기, 요가를 좋아하고 글로 속풀이 하는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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