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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녀 Feb 08. 2024

건널목에서 할머니

빨간 정지 신호로 건널목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내 차 앞으로 한 할머니가 카트를 밀고 지나가셨다.

느린 걸음으로 힘겹게.

그런데 카트 안에 있던 박스가 하나 툭 떨어졌다.

할머니는 모르고 계속 가셨다.

순간 나도 모르게 클락션을 울렸다

클락션 소리에 할머니는 몇 번 좌우를 둘러보셨다. 정작 아래는 보지 않으셨다.

건널목을 다 건너갈 즈음 안 되겠다 싶어 차 창문을 열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는 또 뭔가 하는 표정으로 좌우를 둘러보셨다.

나는 이제 클락션과 할머니라는 소리를 동시에 질렀다. 손까지 흔들었다.

"할머니! 박스! 할머니! 박스!"

할머니는 멀리서 내 몸짓을 드디어 알아챘고, 박스가 떨어진 것도 알아챘다.

할머니가 다시 건널목을 건너오려 했지만 늦었다. 보행 신호등은 빨간불이 됐다.

1초도 안돼 뒤차가 빵빵하기 시작했다.

나는 갈 수 없었다. 할머니가 건너오려고 하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아는 것은 할머니와 나뿐.

인내심이 약한 뒤차는 계속 빵빵댔다.

신호가 끝나자 내 차선을 제외한 차들을 쌩쌩 달리기 시작했고

할머니는 건널목 건너는 것을 포기하셨다.

나는 망설였다.

내가 가면 저 박스가 달리는 차에 부딪칠지도 모르는데.

뒤 차들의 클락션 소리는 더 커졌다.

할 수 없이 핸들을 꺾고 차선을 바꿔 박스를 피해 갔다.

그제야 뒤 차들도 무슨 상황인지 알고 박스를 피해 가기 시작했다.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박스가 무사하길 바라는 할머니의 표정이 백미러에 보였다.


그나마 신호등이 안 바뀌었을 때 내가 내려서 박스를 주워 드렸어야 했나...

할머니는 박스 떨어지는 것도, 본인을 부르는 소리도 어찌 그리 못 알아들으셨을까.

옆에서 누군가 챙겨드려야 할 것 같은 할머니.

그 할머니에게서 나는 당신의 모습을 봤다.

귀가 어둡고 잘 흘리고 다니던 나의 아빠 모습이.

그래서 돕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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