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23. 스페인 그라나다
내 앞에 두 남녀가 손을 잡고 걸어간다.
남자는 짐을 많이 들고 여자는 홀가분하게 몸만 걸어간다.
아마 남자가 여자 짐까지 다 들어준 것이리라.
여자는 종알종알 대며 남자에게 말을 한다.
남자는 그런 여자가 목이 마를까 싶어 가방 안에 물까지 챙겨 건네준다.
부럽다.
내 인생에서 신혼여행으로 해외여행을 올 수 있을까.
부부동반 여행을 할 수 있을까.
나도 남편 옆에서 종알대며 걷고 싶다.
그런 내 모습을 남편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봐줬으면 좋겠다.
(그런 눈빛이 몇 년 가겠냐만은... 원수가 안되면 다행이라고들 하나...)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 안 가장 높은 곳에 '벨라의 탑'이 있다.
벨라의 탑에 올라 종을 울리면 그해 안에 결혼할 배우자를 만나게 된다고 한다.
치고 싶었다. 무지하게 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종을 칠 수 있는 날은 매년 1월 2일뿐이라고 한다.
글렀다.
이래저래 안 되는 운인가 보다.
"왜 종이치고 싶더나"
종 앞에서 서성이자 엄마가 묻는다.
"왜 치면 안 되나! 확 어글리 코리안 됐뿌까!"
심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동안 종을 계속 노려봤다.'방법이 없을까...'
알함브라궁전을 나와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사크로몬테 지구가 나온다.
다로강 계곡물이 흐르고 도로는 좁아진다.
도로가 좁아질수록 사람도 줄어든다.
'성스러운 산'을 뜻하는 사크로몬테는 하얀 벽과 동굴집으로 유명하다.
15세기말 가톨릭왕이 그나라다를 탈환하자 갈곳 잃은 떠돌이 집시들이 언덕에 암벽을 파며 살았다. 바로 플라멩코가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그라나다식 플라멩코인 "잠브라"의 본고장으로 실제 동굴 안에서 마주 앉아 공연을 즐기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집시들의 생상을 볼 수 있는 사크로몬테 박물관을 찾아가는 길은 한참 헤맸다.
이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골목골목으로 안내했다.
그래도 이색적인 풍경에 지칠 줄을 몰랐다.
"엄마! 우리 그리스에 왔다고 속여도 되겠다! 집이 온통 하얗다! "
엄마는 나의 감탄을 들은 체 만 체한다.
이 길이 맞냐며 투덜대기 시작한다. 분명 구글지도에 나와있는 사크로몬테 동굴 박물관은 나올 생각을 안 한다. 문을 닫았나? 고 할 즈음 산 중턱에 떡하니 박물관이 나타났다. 심지어 관람객도 있다.
동굴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성 니콜라스 전망대로 향한다.
오는 길이 헷갈림의 연속이었다면 가는 길은 햇살로 가득했다.
해를 정면으로 마주 보며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아.. 이것이 스페인의 작렬하는 태양인가. 여름에 왔으면 큰일 날 뻔.
놀란 마음에 얼굴을 가린다. 햇살의 공포는 자외선의 공포. 즉 콜라겐의 파괴이자 노화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다.
이런 고행을 겪고도 성 니콜라스 전망대로 향하는 것은 유명세 때문이다.
그라나다에서 가장 유명한 전망대.
1997년 빌클린턴 대통령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이라고 극찬을 했던 그 전망대.
눈 덮인 시에라 네바다 산맥과 붉은 알함브라 궁전을 함께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성 니콜라스 전망대다.
10년 전쯤에도 나는 그 자리에 앉았다.
그때 누군가 앞에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한국말로 했기에 더 기억난다.
"뭐. 이제는 그 건물이 그 건물이고 그 풍경이 그 풍경이네"
아직 젊은 여자가 옆에 앉은 남자에게 말했다.
이해가 간다. 많이 여행을 다니면 감흥도 줄어들기 마련.
일몰시간이 되려면 아직 한 시간 정도나 남았다.
지루하다.
마침 엄마는 앞에서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는 한국인 신혼부부(같아 보인다)를 보면서
"둘이 나오게 사진 좀 찍어줘라"
며 계속 나를 찔렀다.
굳이... 싫은데.. 사진도 못 찍는데 엄마는 둘이서 온 사람들을 보면,
가족들을 보면, 사진을 대신 찍어주라고 하신다.
엄마의 성화에 신혼부부의 사진을 찍어주자 답례로 엄마와 나의 사진을 찍어줬다.
그러려고 사진을 찍어준 것은 아닌데. 항상 답례하는 고마운 사람들.
결국이번에는 일몰 시간을 채우지 못했다.
배도 고프고 힘도 들었다.
나 또한
"뭐 이제는 그 건물이 그 건물이고 그 풍경이 그 풍경이고 그 일몰이 그 일몰이네"
하는 마음이 드나 보다.
그래도 햇살이 뉘엿뉘엿 지며 알함브라 궁전을 오렌지빛으로 물들이는 장면까지는 봤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조명까지 들어와 붉은색으로 짙어질 것이다.
그래 이 까지다.
굳이 욕심내지 말자.
엄마와 나는 전망대에서 미련 없이 돌아섰다.
내일 우리는 새벽 7시 기차를 타고 론다로 떠나야 한다.
체력분배가 중요하다.
안녕 그라나다여.
이렇게 말하고 또 올지 몰라. 인생은 모르는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