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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나 Sep 06. 2016

사춘기 블루스

하루에 한 번은 당신 생각이 나길


이 모든 것이 하룻밤의 일장춘몽(一場春夢)이었으면 좋겠다.


중학생 시절 쓴 일기장에서 발견한 문장 하나.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표현

경악스러워 한참을 읽고 또 읽는다.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허세 가득한 말을 썼지?'


나머지 내용들은 더 심각하다. 

세상의 모든 짐은 내가 혼자 다 졌다. 

비관적이고 우울하다.

온갖 멋지다고 생각하는 단어는 영혼까지 끌어다 붙인다.


아래는 일기장 내용의 일부.


 




2005년 5월 1일 (일)

'지금 모든 것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날 수 있다면 어떨까. 매일 즐겁지도 슬프지도 않다. 내가 왜 사는지 이해할 수 없다...(중략)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 그 뒷일은 생각하지 않겠다. 나에게 중요한 건 오직 지금, 현실뿐일 테니까.'


2005년 5월 22일(일)

'내가 이 세상을 산다는 건 그리 뜻있는 일이 아니다. 나에게서 먼발치 떨어져 있는 희망... 내가 바라는 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내가 바라는 건 단지 고지식한 생각을 버리는 것.'


2005년 7월 21일(목)

'내가 미쳤다. 정말로 미쳐버렸다.'


2006년 5월 17일(수)

'매일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는 난 1차원이다. 1차원인 나는 죽을 것이다.'




일기장 겉표지에는 빨간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다.

'만지면 죽는 줄 알아.'








그 시절, 나는 '사춘기'였다.






사춘기


다른 표현으로는 '주변인'


나는 이 '주변인'이라는 표현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립심 강한 소녀로 비치는 것 같아 은근 기분 좋았었다. 


무엇보다 이 단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내적 갈등을 겪는 시기라는 의미였는데, 나는 실제로 이 시기에 내적 갈등을 심하게 겪었다.


한 마디로 내 생각만 하던 시절.







그래서.

그 시절,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나'였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내가 왜 이렇게 생겼는지.

내가 왜 학교에 가기 싫은지.

내가 왜 자퇴를 해야 하는지.

내가 왜 집을 나가야 하는지.

내가 왜 슬프고 괴로운지.


하나부터 열까지 나 자신과 내 감정에 대해 '왜?'라고 물어봤었다. 매일 일기를 쓰며 나 자신을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질책하고 위로하고 보듬어줬었다. 매일 나 자신과 대화를 시도했다.


하루에 한 번 내 생각을 했다.







반면 어른이 된 후 쓴 일기들을 들여다봤다.

참 형편없다.


무미건조의 극치. 감성과 낭만 따위 없다. 


차라리 사춘기 시절처럼 세상에 대한 비판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것도 없다. 하기 싫은 숙제 억지로 하는 듯한 느낌.


아래는 최근 내 일기장의 내용의 일부.






2016년 2월 3일 (수)

오늘은 내 생일. 그나마 퇴근을 일찍 해서 다행이다. 전날 야근해서 피곤했는데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 수 있어서 다행이다.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2016년 7월 2일(토)

주말에도 일한다. 차라리 이게 더 낫다. 대체휴가를 받으면 금, 토, 일 3일 연속 놀아야지. 그럼 뭘 하지? 그래, 청주 본가로 내려가서 치과치료부터 받아야겠다. 며칠만 있으면 월급날이니 금상첨화다.




이 일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나 자신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내 감정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즉, 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나는 낭만과 감성으로 가득 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일에 치여 나 자신을 잃고 기계처럼 똑같이 생각하며 살아가는 어른이 되기 싫었다. 무엇보다 보잘것없어도 희망이라도 품고 사는 어른이 되길 바랬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느새 내가 가장 싫어하는 어른의 모습이 되어 있다. 더 이상 나에 대해 걱정하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희망도 없다. 그냥 내가 보잘것없다는 걸 순순히 인정한다. 


진짜 별 볼일 없다.





그래서.

다시 사춘기를 맞이하기로 결심했다.


쓰던 일기장을 버렸다.

새로운 일기장을 폈다.

연필도 새것으로 쥐어봤다.


이제부터는 나 자신에 대한 일기를 써내려 갈 것이다.








무조건 하루에 한 번 내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중2병'

사춘기 청소년들의 행동과 생각을 비꼬는 신조어.


상당히 불쾌한 단어다.


우리는 사춘기를 맞이한 학생들의 행동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 그들은 인생 통틀어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을 알고 싶어 하고, 사랑하고 싶어 한다. 감성적이다. 당신의 예전 모습과 같이.


그런데 나 자신의 모습도 잊어버린 체, 똑같은 행동과 생각을 하는 우리가 이들을 비꼬고 있다. 참 못났다. 우리는 오히려 그들의 모습을 존중하고 본받아야 한다. 나 자신을 생각하고 궁금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하루에 한 번 내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또다시 사춘기가 오길 바란다.


비록 그 시절이 우울함으로 가득 찼던 기억밖에 없다 하더라도. 사춘기라는 감정은 당신을 가장 많이 생각하고, 걱정하고, 위로해 줄 것이다. 당신을 성숙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지금 당신을 어른으로 성장시켜준 것도 '사춘기'라는 것을 잊지 말길.


아무리 바쁘더라도,



하루에 한 번은 당신 생각이 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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