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스스로 하는일 이해하기 # - 내가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어
내 첫 직장은 광고회사였다. 예술에 관심 많은 경영대생이었던 나는 광고가 예술과 비즈니스의 중간쯤 위치하고 있다는 생각에 꿈을 키워왔었고, 미국에 사는 아시안들을 대상으로 광고를 만드는 회사에 AE로 지원을 했었다.
면접을 본 날 간단한 테스트를 봤다. 그리고 얼마 후 의외의 결과를 받았다. 인사를 담당했던 부사장님이 나에게 AE대신 주니어 카피라이터 자리를 제안하신 것이다. AE 자리에는 나보다 더 알맞은 지원자가 있었다. 그런데 카피라이팅은 일손이 필요한 상황이었는지, 부사장님은 나에게 시험 결과를 보니 오히려 카피 쪽에 더 잘 맞을 것 같다고 내 의견을 물어보셨다.
'카피라이터라니. 글을 쓴다고? 그것도 광고 카피를? 내가?'
이런 생각부터 들었다. 정말 조금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직군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나는 글을 못 쓴다고 생각했다. 글 쓰기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직군이 있으면 '아 이건 안 되겠군'하고 나 스스로 피해왔었다. 보도자료를 써야 하는 PR 회사는 생각하는 옵션에 넣지도 않았다. 카피라이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도전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바로 그 일들을 직업으로 연달아하게 된 것도 참 아이러니하고 재밌다. 인생의 장난 같은 건가.
카피라이터는 디자이너들과 광고 크리에이티브팀에서 일하게 될 터였다. 카피라이터라니. 내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우연한 기회에 '날 잡아줍쇼'하고 내 앞에 나타난 기분이었다. 직접 광고를 만드는 팀에 속할 수 있다니. 솔직히 AE가 되는 것보다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내가 크리에이티브팀이 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당연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주니어 카피라이터로 첫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후에 알게 된 건데 부사장님은 면접날 '애슐리한테 반해서 뽑았다'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나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부사장님이 무언가를 질문하는 답변에 내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네, 저 완전 잘할 수 있어요."
감사하게도 조금은 뻔뻔하게 보일 수 있는 나의 답변을 부사장님이 좋게 봐주셨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주니어 카피라이터로 일하게 된 건 나에게 신의 한 수와 같은 일이었다. 그때 그 순간의 당돌함이 내 인생의 새로운 길을 터줄만한 엄청난 기회를 안겨준 것이다. 회사의 막내로서, 그리고 크리에이티브 팀에서 나는 다른 분들로부터 배울게 너무 많았다. 각자의 분야에 전문성을 지닌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나는 처음 접해보는 수많은 것들을 받아먹으며 자라나기 바빴다.
이 곳에서 나는 나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 아직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멋진 언니들이 생겼고, 20년 차 카피라이터 멘토가 생겼다 - 그 당시에 20년차셨으니 이제는 거의 30년차가 되어가겠지만 -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애슐리. 내가 아는 모든 것을 퍼 줄 테니 최대한 많이 흡수해봐. 일이 잘못되면 모두 내 책임이고, 일이 잘 되면 모두 네 책임이니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해봐."
이 곳에서 나는 나의 취향을 확장시키고, 더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 멋진 취향을 가진 언니들을 따라다니다 보니 뉴욕을 더 제대로 즐기기 시작했다. 매주 엄청난 아티스트들의 공연을 보러 다녔다. 내가 음악을 더 좋아하게 된 것도, 더 다양한 장르를 찾아 듣고 즐기게 된 것도 모두 이 곳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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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늘 회사 생활이 즐겁고 신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처음부터 잘 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많이 부족했다. 정말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어려울 때도 있었고, 힘들 때도 있었다.
광고업계에서 오랫동안 일한 베테랑 디자이너와 페어가 되었을 때, 그는 나에게 00시까지 몇 가지 카피를 뽑아오라는 미션을 주었다. 레퍼런스를 뒤져보고 아무리 고민해도 도대체 뭘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던 나는 약속 시간이 되었을 때 결국 엄청나게 평범한 문장 몇 개를 멋쩍게 내밀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실 시간은 많이 준 편이었다.
그분은 문장들을 한번 훑어보고, 쓸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깊숙이는 나 자신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내 실력이 다 드러난 기분이라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나의 가능성을 보고 회사에서 제안을 준거였는데, 나를 뽑은 게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후회하면 어떡하지. 역시 나는 글을 못쓰나. 재능이 없나 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가벗겨진 기분이었고 나 자신에게 화도 났다.
그는 화가 나 보였지만 최대한 화를 억누르고 나에게 시간을 더 줄 테니 다시 써와 보라고 말했다. 모든 게 빨리빨리 흘러가고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는 광고업계에서 나에게서 로드가 걸려버린 건 나의 야근뿐만 아니라 그분의 야근, 그 이후 AE팀의 야근을 뜻했다.
부끄러웠던 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일 못하고 민폐 끼치는 캐릭터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카피라이팅 책들을 닥치는 대로 사서 읽었다. 영어로 된 책, 한글로 된 책을 비롯해 인터넷에서 옛날 광고, 요즘 광고, 카피에 관한 기사들을 찾아서 읽었다. 사랑을 글로 보고 완벽히 배울 수 없듯이, 직접 경험해보지 않는 이상 채워지지 않는 게 있을 거란 생각은 했다. 그래도 난 뭐라도 해야 했다. 어떻게든 도움이 되겠지 싶었다.
더 공부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SVA(School of Visual Arts)에서 야간 수업을 끊어서 다녔다. 이 학교는 광고천재 이제석이 다녔다는 학교로도 유명한데, 야간 광고 수업은 수업료만 내면 학원처럼 수강이 가능했다. 수업료도 내가 버는 월급으로 충분히 해결 가능한 정도였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궁지에 몰린 기분으로 시작했는데,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기대 이상으로 효과가 있었다. 내가 읽은 책들은 나에게 일종의 '치트키'가 되어주었다. 베테랑 카피라이터가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하고 정리한 카피의 요령을 나는 책을 통해 단 기간에 익힐 수 있었다. 야간 광고 수업에서 배운 것들도 나는 실전에 바로 적용해 볼 수 있었다.
이후에 내가 쓰는 카피들은 조금씩 달라졌다. 나를 살짝 한심해했던 디자이너분은 바뀐 내 카피를 보고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렇게 바뀌냐?'라고 툴툴대듯 말씀하셨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아 보이셨다. 그 말이 그렇게 뿌듯했고, 노력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뭐라도 하면 되는구나를 다시한번 실감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가 야간 광고 수업을 들으러 다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회사는 이미 내가 개인 돈으로 모두 지불한 수강료를 나에게 전액 지원해주었다. 증빙서류도 이미 내가 돈을 지급했기 때문에 더 복잡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회사는 어떻게든 나에게 지원을 해주고 싶어했다. 그냥 나 스스로 부족한 걸 알아서 더 배우러 다닌거였는데... 그렇게 해주는 회사가 너무 고마웠다. 금전적으로도 도움이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회사가 알아준 것 같아서 더 큰 보상을 받은 기분이었다.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글 쓰기에 재미를 붙였다. '카피라이팅'은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고, 하면 할수록 어려운 일이었다. '단순한 카피 몇 줄, 그냥 쓰면 되겠지'가 전혀 아니었다. 짧은 카피일수록 더 쓰기 어려웠고, 카피가 길어지면 길어지는 대로 어려웠다. 그러나 엄청난 매력이 있었다. 카피라이터로 오랜 기간 일을 한건 아니지만, 이 일은 나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조금 바꿔주었다. 카피라이팅은 나에게 사소하고 당연해 보일 수 있는 무언가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시켰다. 유행어를 많이 알수록, 아는 게 많을수록 풍성한 표현과 다른 시각이 생겼기 때문에, 트렌드든 책이든 영화든 예술이든 다양한 세계를 많이 보고 느끼기를 주문했다.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것들을 연결해보는 연습, 불필요한 것들을 잘라내고 힘을 빼는 연습을 시켰다. 카피는 곧 나에게 무언가의 본질과 컨셉을 찾는 일과 직결되었다. 이는 내가 이후에 일을 할 때, 비단 글 쓸 때뿐만이 아니라 마케팅을 하거나 새롭게 뭔가를 기획해야 할 때도 도움이 돼주었다. 인생의 복잡한 순간에 가끔은 모든 것을 단순화시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비자 만료 시점이 다가오며 나는 비자를 연장하는 대신 한국에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이 회사에서 했던 마지막 프로젝트가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다. 회사는 당시 광고주였던 미국 최대 이동통신회사 버라이즌에게 매거진 형태의 광고를 제안해보기로 했다. 나는 디지털의 힘을 빌려 보헤미안처럼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에 관한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을 기획했다. TV, 인터넷 속도, 전화 기능 등 광고주가 제공하는 서비스들을 매 호마다 특정 인물의 일상 속에 녹이는 컨셉이었다. 1호는 싱어송라이터가 주인공이었고, 매거진 이름으로는 "디지털 보헤미안"이란 단어를 만들어냈다. "디지털 보헤미안"이란 단어를 만들었을 때 나는 x 세대, y 세대, n 세대를 이을 세대 이름으로 만든 거였는데 어찌 보면 요즘 화두인 '디지털 노마드'와도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비록 광고주의 예산 문제로 진행은 못했지만, 이 매거진을 기획하고 만드는 동안 나는 내가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재미와 뿌듯함을 느끼게 해 준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 덕분에 나는 꽤 빠른 시간 내에 주니어 카피라이터에서 카피라이터가 되었다.
우연처럼 찾아온 나의 첫 직업은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많이 남겨주었다. 사람과 취향을 남긴 것도 그렇지만 '나도 글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붙여주었다. 생각보다도 더 재미있어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며, 글 쓰기를 즐기기 시작했다.
카피라이터로 일해보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글 쓰기에 자신감이 없는 상태로 남아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나의 두 번째 회사인 PR회사에 들어갈 생각을 못했을지도 모르고, 지금처럼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가끔 어떤 직업은 이렇듯 우연처럼 찾아오는가 보다. 정말 다행인 일이다. 지금은 글을 쓰지 않는 나를 상상하기가 힘들다. 앞으로도 꾸준히 쓰고 또 쓸거다. 이 글을 다시 읽을 때의 나도 계속해서 뭔가를 쓰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