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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ra윤희 Oct 29. 2024

내 간, 가져가지 마!

고백에 관한 이야기 1

 엄마, 나, 여동생 함께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엄마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간을 이식해 줬다는 훈훈한 감동 스토리를 우리에게 전해주었고, 이야기는 혈액형으로 흘렀다. 엄마와 같은 A형 피를 가진 나는 잠깐이지만 속으로, ‘엄마가 간이 필요하면 내가 드려야 하는구나. 아플 것 같은데... 가족 중에 A형이 나뿐이라니...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며 웃지 못하고 있었다. 이야기 끝에 엄마는 동생에게 “민희는 O형이니까 엄마한테도, 언니한테도 피 나눠줄 수 있어.”란 말을 했고,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동생은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 했다.   

   

 “내 피 가져가지 마!!”     


 울며 멈춰 선 동생을 앞에 두고 엄마와 나는 서로 바라봤다.

 황당함과 서운함의 우리 엄마. 황당함과 부러움의 나.    

 

 “내 간 가져가지 마!!” 나도 이렇게 외치고 싶었던 걸까.      




 그 후로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났지만, O형 혈액형을 가진 사람은 등장하지 않았다. 동생은 농담이지만, 제부와 조카를 보며 “이래저래 일생에 도움 안 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해서 모두 박장대소를 하고 웃은 적이 있다. 난 조용히 나만의 위로를 건넸다.


 “너 A형으로 태어나서 엄마랑 평생 엮일래, 아님 그냥 피만 나눠줄래?”     


 살아오면서 엄마와 동생보다, 엄마와 내가 더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조금 더 운명적이라고 해야 하나. 엄마와 나는 혈액형, 띠도 같고, 외모도 여러모로 비슷하고 둘 다 지독한 길치다. 겁 많고 어리바리한 걸 보면 성격도 같은 결이 많다. 한 번은 엄마가 점을 보고 오셨다며, 신나서 말씀하셨다.


 “너랑 나랑은 아주 끈끈하게 이어져 있단다. 엄마 곁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붙어산다는데?”     


 엄마에게 결정적인 사건이 있을 때, 동생은 꼭 자리를 비웠었다. 외국 혹은 지방에 있거나 입원을 하고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운명은 꼭 그 둘을 갈라놓았고, 엄마에게 일이 생겼을 때 그 곁을 지키는 건 나였다. 올해 여름, 동생은 가족과 미국으로 떠나 1년간 자리를 비우게 되었고 엄마는 불안해하셨다.      


 “너랑 나랑 한국에 남아서, 또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니니...? 엄마 불안하다.”   

  

 ‘엄마..., 내가 더 불안해. 그 운명의 끈이 다시 선명하게 굵어지는 것만 같아서요.’     




 엄마를 사랑한다. 엄마의 슬픔이 우리 곁에 유령처럼 자꾸 피어나지 못하게, 늘 기쁜 일을 만들어 드리려 노력했다. 아들 없는 집 장녀의 무거운 뒷모습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고 싶었고, 엄마의 자랑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 ‘공부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을 때 난 1초도 망설임 없이 ‘엄마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어서’라고 말했으니, 청소년기 내 마음 지분의 상당 부분은 엄마의 것이었다.    


  

올해 김장도 엄마와 나, 둘이 할 예정

 지금도 사랑을 바탕으로 엄마와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 점쟁이의 말대로 난 늘 엄마 옆에 서성거리며 멀지 않은 곳에 살았다. 같은 아파트 다른 동에 살며 그리울 틈 없이 연락을 주고받기에,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 무슨 밥을 먹었으며, 컨디션이 안 좋아서 어떤 약을 먹고 몇 시에 잠들었는지, 수많은 정보를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된다. 엄마를 외롭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성공하지 못한 딸이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효도인 것만 같아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종종 조금 멀찍이 떨어져 서로를 그리워하는 시간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며칠 연락을 못한 채 설거지를 하다가 ‘아차! 엄마한테 며칠 전화 못했네?’하며 서둘러 고무장갑을 벗고 핸드폰을 드는 날도 있으면 좋겠다. 어차피 운명의 끈으로 단단하게 묶여있는 사이라면 몇 년 정도는 이별해도 되지 않을까 하며, 이사를 꿈꾼 적도 있었다. 가끔 만나면 더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애틋한 시나리오를 남몰래 여러 번 완성했었다.      


 여전히 난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떠나지 못할 것 같다. 이 운명의 자성(磁性) 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엄마에게 솔직하게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뿐이라는 체념을 하게 된다. 동생이 어릴 때 “내 피 가져가지 마!”하고 뺏기고 싶지 않은 마음을 솔직하게 포효했던 것처럼, 가족이라는 이유로 쉽게 가져가도 된다고, 묻지 않고 공유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나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며 살면 더 행복하게 엄마 곁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도 속으로 연습한다.


 “엄마, 나 오늘 글 쓰느라 바쁘니까, 나중에 연락해요.”

 “오늘은 내가 바쁘니까, 다음에 놀러 와요.”      


    



 동생이 “내 피 가져가지 마”라고 울었던 날 저녁, 집에서 우린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며 함께 웃었다. 엄마는 A형 딸이 있어서 다행이라며 웃었고, 동생에게는 “네 피 안 가져간다”라고 약속 도장을 찍어주며 웃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아빠가 한마디 하셨다.      


 “니들은 내 혈액형이 뭔지는 알고 있나?”

 “................”          



 ‘아! 아빠도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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