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공감을 잘해서 살기 피곤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종종 내가 등장인물이 된 기분이라, 항상 울고 짜고, 콧물까지 줄줄 흘리며 봤다. 가족 중에 그런 현상이 나만 유난해서, 피도 눈물도 없는 동생의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었다.
“엄마, 언니 또 울어. 슬픈 장면도 아닌데 운다? (웃음)”
내 눈물은 진심인데,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동생이 미웠다. 웃음거리가 된 것 같아서 울면서도 짜증이 났다.
이야기 = 스토리라는 것은 인간의 영혼 밑바닥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 밑바닥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과 사람을 근간에서부터 서로 이어줍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p326 -
난 종종 내 영혼의 밑바닥을 한 번씩 톡 치고 올라오며 ‘자기 공감’에 빠진다. 누군가의 영혼 밑바닥도, 너무 깜깜하거나 너무 깊지 않으면, 함께 손잡고 내려갔다 올라올 수 있다. 나는 그런 과정이 어렵지 않다. 마치 내 영혼이 그 사람의 영혼이 된 것처럼, 가끔은 그렇게 이어진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자라오면서 이런 성향은 엄마아빠가 부부싸움을 할 때 가장 나를 힘들게 공격했다. 엄마의 불만, 아빠의 하소연, 그 중간에서 누구의 편도 될 수 없는 나였다. 엄마의 이야기 한 줄 한 줄 모두에 사연이 있고 애절함이 있어서,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 아빠의 하소연에 묻어있는 희생정신과 인내하는 마음도 투명하게 보였다. 또 은근히 내가 나서 부부싸움의 냉전기간을 줄여주길 기대하는 두 분의 마음도 외면하기 힘들었다.
고등학교 때 엄마아빠의 부부싸움을 말리다 지쳐 동생의 방으로 들어갔다. 난 살짝 눈물을 머금고, 책상에 앉아 열심히 공부를 하는 동생 옆에 앉았다.
“엄마 아빠가 화해를 안 하니까 공부도 잘 안되고,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네?”
동생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언니가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 언니가 자꾸 관여하니까 더 소리 높여 자기 얘기만 하는 걸 수도 있어. 뭘 그렇게 신경 쓰고 살아?”
진정 내가 잘못된 것일까.
동생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다 주옥같은데?
난 또 이렇게 동생의 말에도 공감해 버렸다.
동생의 하드 트레이닝 덕분에, 눈물도 조금은 조절할 수 있는 사람으로 컸다. 영화 볼 땐, 의식적으로 ‘이건 그냥 영화일 뿐이야.’를 되뇌고, 누군가 고민을 상담해 올 때면, ‘응, 이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하며 포기하는 요령도 생겼다.
그래도 공감하는 습관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상대방이 울 것 같으면, 내 눈도 이상하게 촉촉해지는 그 ‘몹쓸’ 습관이 힘들어서 난 지금도 슬픈 영화를 피한다. 슬픈 이야기를 들을 때 혼자 다른 생각 가지치기를 하며 너무 깊이 빠지지 않으려 한다. 울면 ‘갱년기가 왔나’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나이라, 눈물을 상당히 자제한다.
글을 쓰면서 좀 더 공감력이 상승했으려나. 종종 내 영혼의 깊은 곳, 어두운 심연에 불을 켜고 들여다본다. 거기엔 내가, 혹은 남들이 애써 모른 척했던 슬픔도 있고, 좀 더 축하받아 마땅했던 일들도 있다. 공감받지 못 한 내가 거기에 있다. 더 공감받고 싶었던 어린 내가 무릎을 세운 채 쪼그리고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하... 숙련된 공감전문가, 내가 널 공감해 줄게. 그 수밖에 없잖아? 오늘은 또 뭔데?”
난 가끔 아무도 없는 새벽에 혼자 휴지산을 만든다.
공감력이 높아서 좋았던 적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마음 약하고, 우유부단하고, 쉽게 속고, 눈물이 많아서 때로는 부끄럽다. 그러면서도 내 주변에는 공감력 좋은 사람들이 많기를 바랐다. 나도 공감받고 싶으니까. 내가 울 때, 휴지를 건네는 사람보다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기를 바랐다.
세상은 감성과 이성, 공감과 냉정, 오목이와 볼록이들이 반씩 모여사는 곳이다. 내가 오목이면 상대는 더 볼록하게 되는 것이 서로에게 맞춰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내가 공감을 잘해주니 주변에는 공감을 바라거나, 공감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런 현실이 화가 나고 억울하기도 하다.
내 마음을 공감해 주는 문장을 만나고 싶어서 책을 본다. 내 영혼이 다른 이의 영혼에 닿기를 바라며 글을 쓴다. 울고 싶어서 또 웃고 싶어서 우린 넷플릭스를 켠다. 때로는 눈물버튼과 공감버튼을 의식적으로 꺼두고 살아가기도 하지만,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고, 그 사람의 생각에 공명하는 '능력'은 이 세상에 필요한 능력인 것이 분명하다.
동생은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에서 동생은 눈물도 많아지고 공감력도 상승했다. 조카가 밤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 불을 켰다 끄고 다시 잠드는 원인을 어떻게 해서든 이해하려 했다. 자동차 문, 냉장고 문을 비롯한 모든 문을 본인이 닫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조카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는 것 같았다. 물병에 물이 없다며 울면서도 물병을 절대 가져가지는 말라는 그 이중적인 마음도 이유가 있겠거니 했다.
하지만 피는 못 속인다고, 야속하게도 조카는 공감보다 냉정의 성향을 띠는 여학생으로 자랐다. 공감받지 못해 쓸쓸한 동생은 가끔 나를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