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에 관한 이야기 1
늦은 오후 시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오후 6시 30분 즈음을 좋아한다. 내 가슴팍을 얽매고 있던 앞치마를 휘리릭 풀어내고 부엌 다용도실 창틀에 기대어 멀리 아파트 넘어 붉게 칠해진 하늘을 바라보곤 한다. 이상하게 그 시간에 피어나는 노을을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향기도 함께 올라오는 느낌이다.
여름에는 끈적한 땀 냄새와 비릿한 풀 내음, 봄에는 살짝 먼지 섞인 분주한 냄새들과 흐릿한 꽃향기,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는 낙엽끼리 부비며 만드는 비옥함의 냄새. 그런 향기들이 그 시간 즈음에는 더 확연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언젠가 비슷한 향을 맡았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내 마음도 잠시 여러 가지 색채로 어른거린다. 하지만 그 향기와 색채는 이내 옅은 검은색으로 빨려 들어가고, 나도 나를 기다리는 잡다한 집안일로 발걸음을 옮긴다.
노을의 끝에 종종 함께 올라오는 향기가 있다. 엄마의 향기. 약간의 음식 냄새. 어린 시절 엄마가 자주 머물던 부엌의 향기. 그 향기가 걷히면 진지하면서도 결의가 느껴지는 엄마의 뒷모습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립다. 왜 나는 노을을 바라보면 늘 무언가가, 누군가가 그리울까.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 노을이 걸리는 초저녁 시간에 가끔 엄마는 서둘러 저녁상을 차린 후 동생과 나의 손을 잡고 동네 놀이터 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나가곤 했다. 엄마와 나는 항상 오른쪽을 바라보며 아빠를 실은 버스를 기다렸다. 엄마는 자꾸 자리를 이탈하는 동생을 보느라 한자리에 있지 못했다. 그럴 때면 난 엄마 대신 오른쪽 먼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빠를 기다렸다. 1초라도 빨리 아빠의 귀가를 알아채고 싶었다.
그렇게 바라보는 오른쪽 하늘, 찻길 배경엔 늘 해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여러 가지 색채를 드리웠다. 해가 물러가는 그 뒷모습은 예뻤다. 예쁘면서도 이상하게 뭉클했다. 저런 색을 무슨 색이라고 말하지? 주황색이나 노란색 혹은 빨간색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노을의 색을 뭐라고 해야 할지, 어린 나는 그 색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아빠는 우리가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내리면서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거나 큰 소리로 “우리 딸, 나와서 아빠 기다렸어?” 하는 식의 애정 섞인 말을 해준 적이 없다. 무뚝뚝한 아빠는 “뭐하러 애들 다 데리고 나왔어. 집에 있으면 금방 들어가는데.” 하는 말로 반갑다는 말을 대신했다. 그래도 난 그 시간, 그 순간이 너무 벅차고, 간질간질해서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빠를 마중 나가고 싶었다.
중학교 시절, 아빠와 내가 좋아했던 비틀즈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차에서 함께 가사를 흥얼거리며 원주에 있는 큰집으로 떠나던 고속도로도 떠오른다. 자동차 창문 너머의 하늘엔 반짝이는 해가 저물어 가며 붉은 노을을 카펫처럼 펼치기 시작한다. 마치 우리 이야기의 배경이 되어 주려는 듯, 노을과 비틀즈가 하모니를 만드는 듯, 어떤 이야기도 꺼내 놓으라는 듯, 노을은 그저 조용히 나의 시간에 끼어든다.
동생은 뒷좌석 오른쪽 구석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누워 잠들어 있고 나는 다소 불편한 중간 좌석에 앉아 초롱초롱한 눈으로 엄마의 이야기, 아빠의 이야기 모두에 온갖 참견을 늘어놓는다. 이야기는 종종 맛있고 상냥하게 부딪히며 웃음이 되고 궁금증이 되고, 과거가 되고 또 미래가 되었다.
조금 불편한 분위기로 흐르게 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내가 가진 ‘노을 카드’를 한 번쯤 꺼내 놓아도 좋다. “엄마, 아빠 저기 저 노을 좀 봐. 오늘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노을이 더 선명하고 여러 가지 색으로 보이지 않아?”
노을의 시간은 일상이 차분하게 때로는 소란스럽게 마무리되는 시간이다. 흙 강아지처럼 동네 골목에서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도 손과 엉덩이를 털고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 일터에 갔던 사람들도 어떤 방식으로든 업무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향하려 한다. 마당에서 잡초 뽑던 사람, 부엌에서 밥 짓던 사람, 무거운 짐을 옮기며 지쳐가던 사람, 모두 노을이 하늘에 걸릴 때는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떠올린다.
그 순간 시간은 자꾸 과거로 되돌아간다. 오늘도 열심히 살았네. 아까 그 친구가 한 이야기는 무슨 의미였을까? 아차, 그거 오늘 해야 했는데 못 했네. 오늘 조금밖에 못 놀았네. 아까 옮겨 심은 나무가 잘 자라야 할 텐데.
그렇게 움직인 시곗바늘이 어떤 때는 더 먼 과거로 우리를 데려가기도 한다. 나보다 일찍 세상을 떠난 사람이 떠오르기도 하고, 사랑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한 마음이 아련하기도 하고, 술 마시고 기억이 끊어졌던 아찔했던 기억도 웃음과 함께 등장한다. 너무 괴로워서 방에서 나가기 싫을 만큼 힘들었던 시간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행복해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기억으로도 들어가 본다.
그러다 밤이 시작되면 또 체념하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일상을 살아간다. 노을이 사라지고 기어이 저녁이 시작되는 것처럼, 결국은 물러가야 하는 추억이라는 걸 알고 있다. 노을이 어둠에 흡수되는 것처럼 나의 그리움도 마음 어딘가에 남김없이 흡수되어버려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해가 떠난 자리에 한동안 머물러있는 노을을 보며, 나도 쉽게 지우고 떠날 수 없었던 기억의 파편 속을 헤집고 들어가 본다. 부질없지만 의미 없진 않을 거라며 나만의 책갈피를 추억 속에 붙여본다. 잊고 살았지만 끝내 완전히 잊히지 않았던 누군가가, 어느 순간이, 노을과 함께 떠올랐다며 짧게 마음에 적어본다.
아마 누군가도 해의 뒷모습에 길어지는 아름다운 색을 보고 어떤 의미를 걸어놓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니 ‘노을’이란 예쁜 이름을 지어주었겠지. ‘저 노을의 색을 어떤 색이라고 말해야 하지?’하고 고민했던 어린 나의 마음이 기억난다. 붉은색이지만 좀 더 노란색일 때도 있고, 때로는 잠깐이지만 자줏빛을 하늘에 걸어놓는 노을은, 늘 무언가를 그립게 한다. 그러니 나에게 노을의 색은 ‘그리움의 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