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가 없으면 안 돼요.

천둥번개 끝의 햇살 '공감이'

by Libra윤희

내 마음속에는 ‘공감이’라는 녀석이 살고 있다. 얼마나 부지런한지 내가 눈 뜨는 순간 녀석도 눈을 떠서 일을 시작한다. 아니, 얘는 안 자는 것 같다.


7시 10분 핸드폰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깬 나는 공감이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아직 더 자도 되잖아? 한 10분 정도 게을러져도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는다고. 그렇지?’

‘당연하지. 15분 정도 더 누워있어도 돼. 어제 큰애 때문에 늦게 잤잖아. 요즘 애들이랑 남편도 아침 잘 안 먹고 나가 버리는데, 혼자 부지런 떨지 말고 피곤할 땐 좀 게을러지자고. 안 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잘했다고 칭찬하는 사람도 없다고.’

이렇게 시작된 공감은 하루종일 나를 편안하게 달래준다.

유난히 운동하기 싫은 날, 시계만 째려보며 ‘운동 시작해야 하는데’만 수십 번 반복하고 있는 나에게 공감이는 세상 따스한 목소리로 말한다.

‘운동 하루 안 한다고 살이 더 찌거나 건강이 망가지는 일은 없어. 오늘 저녁에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지금 운동하면 금방 피곤해져서 애들한테 짜증내거나 졸음이 쏟아질 수도 있어. 이런 날 하루 쉬어줘야 내일 또 운동할 힘이 생기는 법이지. 운동 하루 이틀하고 관둘 것도 아니잖아?’

자기 전에 핸드폰 안 보기 하루 째, 공감이가 또 시작이다.

‘너무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하루 종일 니 시간 없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일했으니 너만의 시간을 즐길 자격이 충분하다고. 자기 전에 30분 온전히 너 자신을 위해 릴랙스 하라고. 딱 30분 정도 핸드폰 본다고 시력이 나빠지거나 내일 컨디션이 망가지는 일은 없을 거야.’


난 내 감정에 공감해 주고 나를 위로해 주는 공감이를 시도 때도 없이 필요로 하면서도 수시로 부정하고 멀리하려고 노력했다. 헤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이별을 꿈꿔왔다. 특히 수험생 시절에는 너 때문에 망쳤다며 공감이를 미워하고 원망하면서도 시도 때도 없이 불러젖히며 징징거리고 투덜거렸었다.


“공감이 보다 센 놈이 필요해. 내가 약해지려 할 때 번개처럼 등장해서 정신 차리라고 채찍질하며 천둥 같은 목소리로 내 마음속을 가득 채울 만한 그런 놈. 나의 의지, 결심, 계획을 대변할 센 놈.”




난 중년이 돼서야 자신을 이해하고 파악하고 연민하게 되었다.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식이 싫은지, 사람의 어떤 면을 유심히 보는지 이제야 알기 시작했다. 인생을 흘러가는 대로 놓아줄 때도 필요하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40대가 되고 아이 둘을 키우게 되면서 더 이상 상처와 스트레스를 공감해 주는 마음속의 작은 목소리를 미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 마음을 알아주는 공감이가 없었으면 삶이 얼마나 황폐하고 쓸쓸했을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이젠 공감이와 적당히 밀당도 하고 공감이를 잠재우는 방법도 터득했다. 마음에 on/off 기능과 볼륨 up/down기능이 추가된 공감이 버튼이 생겼다.

살다 보면 자신과의 약속을 수 없이 많이 만든다. 내일부터 다이어트 시작, 1시간 일찍 일어나기(미라클 모닝 이라나 뭐라나), 아이들 다그치지 않기, 주 5회 이상 운동하기, 일주일에 책 한 권 읽기, 커피 줄이기, 냉동 음식 줄이기, 탄수화물 줄이기, 여행 가기, 버킷리스트 만들기. 그다지 구체적이지도 않고 못 지킬 것 뻔한 약속과 결심이 난무하는 하루가 끝나면 속절없이 후회가 밀려온다. SNS에는 저마다 하루 미션 완료라는 인증 글과 사진이 올라온다. 하지 말걸, 좀 참을걸, 도대체 언제까지 결심만으로 끝나는 걸까, 이놈의 의지박약, 자아비판의 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하지만 끝에는 항상 공감이의 위로가 있다는 것을 이젠 알고 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네가 아이들한테 매일 하는 그 말, 내가 너한테 해 줄게.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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