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를 좋아하게 되는 것에는 이런저런 이유가 있다. 감독이 좋아서, 연기자들이 연기를 잘해서 혹은 예쁘거나 잘생겨서, 음악이 좋아서, 스토리가 감동적이어서, 지금 내 상황과 딱 맞아서 등등. 나의 경우 영화 속에 어떤 대사에 매료되면 그 영화를 좀처럼 잊기 힘들어진다. 그 대사는 몇 년이 지나도 내 머릿속에 남아 다시금 그 영화를 플레이하게 한다. 나에게<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은 그런 영화 중 하나다.
아직 학생의 신분으로 빡공 하던 시절 우연히 아무 기대 없이 <킹덤 오브 헤븐>을 보게 되었다. 남주 올랜도 블룸이면 <반지의 제왕>에서 긴 금발 머리 휘날리며 멋짐 폭발했던 화살 요정이 아니던가. 여러 호빗족들 사이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외모를 자랑하던 레골라스가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카리스마와 야성미가 넘치는 주인공 발리안으로 등장한다. 수년이 지난 후 <킹덤 오브 헤븐>을 다시 보니 곱상한 청년의 모습을 한 올랜도 블룸은 미스 캐스팅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아버지 역할의 리암 니슨과는 어디 하나 닮은 구석이 없어서 “아버지를 너무 닮아서 한눈에 알아봤어요.”하는 여자 주인공의 대사를 무색하게 한다. ‘당시 레골라스의 아름다움이 내 눈과 마음을 가렸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184년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중세시대. 대장장이였던 주인공 발리안은 어느 날 찾아온 아버지로부터 영주자리를 물려받게 되고 이슬람의 지도자 살라딘으로부터 백성을 지키기 위해 처절한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11세기말에서 13세기말 사이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계속되었던 십자군 전쟁은 그 어떤 전쟁보다도 잔인했다고 한다. 신의 이름으로 감행된 그들의 학살이 너무나도 처참했던 것은 그러한 만행이 신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일까. 그토록 잔인했던 싸움의 가운데에는 결국 예루살렘이라는 성지가 있었다.
길고 처참한 전투 끝에 발리안은 예루살렘의 백성들 모두 온전하게 기독교권으로 이주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예루살렘을 살라딘에게 넘기기로 하는 장면이 있다. 살라딘이라는 인간의 카리스마와 지도자로서의 능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 장면을 나는 가장 좋아한다. 모래 바람이 부는 광활한 대지 위에 십자군의 수장 발리안과 이슬람의 지도자 살라딘 둘은 서로에게만 들릴만한 목소리로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협상이 끝나고 진영으로 돌아가는 살라딘에게 전쟁으로 지쳐 핏물 가득한 얼굴을 한 발리안은 묻는다.
“What is Jerusalem worth?”
예루살렘은 어떤 곳이죠?
그러자 살라딘은
“Nothing.”이라고 답하는데,
순간 발리안의 얼굴에 스치는 수많은 생각의 그림자.
하지만 몇 발자국 걷던 살라딘은 곧 뒤돌아 “Everything.”이라고 말한다.
그 대사를 듣는 순간 내 심장은 Nothing이란 대답에서 한 번 '쿵', Everything이란 대답에서 한 번 더, ‘쿵 쿵’ 뛰었다.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매일매일의 가치가 사실은 별 것 아니지만 또 그 매일매일이 우리의 전부가 아닌가. 우리는 평생을 Nothing이면서도 Everything인 모든 것을 위해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발리안과 살라딘이 서있는 처절한 전쟁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지금과 뭐가 다를까.
살아가면서 너무나도 소중하고 분명했던 어떤 가치가 시간이 지나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나이가 들수록 ‘Nothing’이란 부분에 더욱 마음이 끌린다. 하지만 또 돌아보면 그때는 그 가치가 나의 영혼을 지배했고 ‘Everything’이었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과거를 돌아다보며 ‘아, 내가 그때는 정말 별 것 아닌 것에 그토록 집착했었구나.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내 인생에 아무 영향도 없었을 그것 때문에 그토록 고민했었다니. 왜 나는 그딴 것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하는 일들이 떠올라 부끄럽고 후회가 될 때가 있다. 하지만 단언컨대 지금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역시 고민 끝에 비슷한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상당히 안타깝지만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우린 그 남자 그 여자와 결혼했을 것이고 지금과 비슷하게 업치락 뒤치락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지금은 Nothing이라고 생각되는 그 문제가 그때는 Everything이었을 테니. 어느 영화 제목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와 반대로 우리의 삶에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들도 가득하다.
분명 영화에서보다 더 잔인했으리라 여겨지는 그 전쟁의 근원인 예루살렘은 Nothing이지만 동시에 Everything일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모든 가치를 대변한다는 생각으로 한동안 묵직한 여운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나는 발리안과 살라딘의 대화를 몇 번이고 돌려봤던 기억이 난다.
OTT가 보편화되면서 긴 시간을 영화에 할애하는 게 꽤 피곤한 일이 되었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도 가끔은 유튜버의 요약영상이 아닌, 영화 전체의 긴 호흡을 따라가며 기억에 남을 만한 영화를 발견하는 것도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그런 호흡을 느끼고 싶다면 오늘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킹덤 오브 헤븐 - Kingdom of Heaven>을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