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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경의 동아줄은 시작부터 썩어 있었고

나, 그럼에도 냉소에 잠기지 않기를

by 윤노을

앞서 적었던 '그 사건'이 생긴 후 내게 닥쳐온 고단함은 부피가 컸다. 신감이 가장 큰 면적을 차지했다.


지방 소규모 언론사를 옮겨 다니던 내게 상경은 외면하기 힘든 기회였다. 독립으로 인해 생길 전세자금 대출이자와 대폭 늘어날 생활비, 부모님의 반대를 감안하더라도 그랬다.


메이저나 중견급을 제외한, 심지어 수도권도 아닌 지방 영세 언론사 기자는 최저시급 아르바이트보다 못할 때가 많다. 내가 빵집이나 카페 파트타이머로 투잡을 뛰면서 받는 급여가 언론사 월급을 뛰어넘을 때가 부지기수였다.


회사에서 인센티브를 받으려면 광고 영업을 뛰는 수밖에 없다. 심지어 기본급이 없다시피 한 채 영업 인센티브로 벌이를 충당하는 사례도 흔하다.


영업에 자신이 없던 나는 '차라리 육체노동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편의점 야간, 빵집, 카페, 고깃집 가릴 것 없이 시간만 되면 일했다.


팍팍했지만 나름 정당하게 바빴고 '돈 못 버는 기자'라는 자각에도 부끄럽지는 않았다. 그렇게라도 글을 쓰는 직업에 종사하는 게 좋았다.


다고 몸이 마음을 따라가 주는 건 아니어서, 입술이 터지거나 위산이 역류해 빈속에 토하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그런 내게 한 선배의 '기자 일만 해서 월급 받고 살자'는 제안은, 유혹적이었다.


평생 발붙이고 산 고향을 떠나 눈 뜨고도 코가 베인다는 서울 살이를 해야겠지만, 무직자인 부모님에게 매달 송금할 생활비 생각에 뒤척이는 밤이 줄어들 수 있다면.


그래서 지난한 반대와 설득을 거쳐 서울 변두리에 원룸을 구했다. 경력직 입사자라도 서울엔 연고가 없으니 신입 같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취재처를 돌았다.


그런 상황에서 요일 밤에 걸려온 임원의 전화를 거절할 용기는 없었다. 수 있는 건 그저 나를 입사시켜 준 선배에게 연락해 전후 사정을 말하는 정도.


선배는 뜸을 들이더니 잘 갔다 오라고 했다. 물론 잘 가지도, 잘 오지도 못했다. 가던 택시 안에서는 성추행을 당했고 오는 길은 공포와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내 전화를 받고 달려온 남자친구가 나를 업고 가다시피 경찰서에 데려가지 않았다면 아마 불 꺼진 방 침대 위에서 나는 하염없이 멍청하게 앉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가 하얬다.


그리고 이후에 들은 선배의 말엔 머리가 시꺼멓게 깨질 것 같아졌다. 선배는 내게 '미안하다'며, 사실 그 임원은 이미 전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내 연락을 받은 뒤 '쎄했다'고 했다. 조심하라고 말하려 했다고도 했다.


미안하게도, 미안하다는 말은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알고도 나를 불러들였구나. 애초부터 썩은 동아줄이었구나. 기회가 아니라 악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일이었구나.


나는 그렇게 끈 떨어진 연, 서울 변두리 원룸에 툭 떨궈진 무직자가 됐다. 꼬박꼬박 대출 이자를 갚아야 하는 무직자.


하고 싶은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을 혐오하거나 냉소에 잠기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목적도 대가도 없이 나를 지탱하고 일으켜 세워 준 고마운 사람들이 더 많았다. 친구와 연인에서부터 일면식도 없는 경찰과 고용노동부 직원 분들에 이르기까지.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 목적 없는 위로가 되고 싶어졌다. 말 한마디로 배신을 확인받고 신뢰를 상실한 채 구덩이에 떨어졌지만, 또 그 타인의 '말 한마디'로 지난한 과정 중에 숱한 위로를 받았다.


다만 말재주는 없고 글재주만 있어서 이렇게 쓴다. 어디 사는 누군지 모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내가 영영 놓쳐버린 것만 같던 일상과 소소한 행복을 끝내 다시 붙잡아 데려왔듯이, 이 글이 단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썩지 않은 동아줄이 되기를 소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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