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분노에 휩싸인 그릇된 신념의 인간상(人間像)
집단의 광기인가? 개인의 분노인가?
*영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항상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나고 그 결과는 참으로 다양하다.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영화라도 인간이 사는 세상과 너무나 닮아있다. 아무리 이야기를 지어낸다고 해도 그 토대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부터 시작된다. 감독 캐서린 비글로우는 영화 <폭풍 속으로> <블루스틸> 등 굵직한 액션을 표현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할리우드에서 제임스 카메론의 전부인이라는 묘한 꼬리표를 영화 <허트 로커-The Hurt Locker,2008> 한방으로 보기 좋게 날려 버린다. 천문학적 숫자의 흥행을 기록한 전남편이 감독 제작을 한 영화 <아바타>와 같은 시기에 개봉되고, 같은 해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올랐다. ‘보기 좋게’라는 표현이 적합하지는 않지만 <허트 로커>가 그 해 감독상과 작품상을 거머쥐면서 캐서린 비글로우는 더 이상 누구의 전부인이 아닌 ‘감독 캐서린 비글로우’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이후 리얼리티를 살린 영화 <제로 다크 서티_Zero Dark Thirty,2012>로 자신의 강점을 부각한 영화를 탄생시킨다.
리얼리티 3부작이라 불리면서 <허트 로커>, <제로 다크 서티>에 이어 <디트로이트>가 그 세 번째 자리를 맡았다. 1967년 디트로이트 알제 호텔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영화화해서 제작했다. 때는 인종 차별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고, 이미 디트로이트는 흑인 폭동으로 인해 군병력까지 도심 안에서 포진을 하고 있었다. 보통의 삶의 살아가는 이에게는 삶의 터전이지만 갈등의 구조가 양극에 달하면서 누구 하나 장난 삼아 도발적인 행동을 해도 그대로 폭탄이 터져버릴 것 같은 긴장감이 팽배한 상황이었다. 그저 평범하기도 하고 미래에 관해 꿈을 꾸고 살아가던 다양한 젊은이들이 하필 그곳에 모이면서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만다. 디트로이트를 장악한 군경찰이 못마땅했던 흑인 청년이 말 그대로 젊은 객기로 멀리 군집해있는 군경찰을 향해 육상용 화약총을 쏜다. (생긴 것도 꼭 딱총처럼 생겼다) 총소리와 불꽃에 군경찰은 자신들을 노리는 저격수가 있다고 믿고 알제 호텔의 창문을 향해 총을 쏘고, 순식간에 호텔은 초토화된다. 이때 평소에도 인종차별 성향이 강한 경찰 필립 크라우스(윌 폴터)가 호텔에 들어가서 용의자를 찾고 투숙객을 위협하며 온갖 협박과 살인이 숨 막히게 벌어진다. 죄 없는 청년이 용의자가 되고, 흑인과 함께 어울렸다는 이유만으로 같이 있던 백인 여성들은 창녀 취급을 받고, 심지어는 모든 상황을 보고 목격했던 흑인 사설 경비 보안원은 어느 순간 용의자로 바뀌어 있다. 이 호텔에서 각종 부당한 구타, 어처구니없는 살인, 학대, 협박, 타협이 벌어진다.
이 호텔에서 벌어지는 씬이 대략 40분가량 소요된다. 영화 전체의 러닝타임을 봤을 때 상당히 긴 시간에 해당된다. 요즘 워낙 말도 안 되게 잔혹한 영화가 많다 보니 이 씬 자체가 물리적인 잔혹함이나 공포물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장면은 굉장히 냉혹하게 보인다. 보다 보면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무엇 때문에 저런 광기에 휩싸이고, 무엇 때문에 저렇게까지 두려워할까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감독의 의도가 이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경찰에게 죽임을 당하고, 부당한 죽음이 있었지만 경찰은 공무집행 중이었고,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면죄부를 받는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호텔에서 부당한 심문과 가혹행위가 있었던 장면보다 사건 후 재판 법정에서 증인이자 피해자로 출석한 흑인이 오히려 인권 모독을 당하고, 배심원이 전원 백인이라는 것이 더한 반전이자 허탈한 결말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캐서린 비글로우는 백인 여성이지만 상당히 중립적으로 이 영화를 그려냈다. 항상 그랬듯이 사전 지식 없이 영화 시사회에 들어간 나는 심지어 감독이 백인 여성일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다.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버해서 흑인 편을 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백인이 옳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단지 이런 일련의 사건이 개인의 분노에 관련된 문제인지 집단의 광기인지에 대한 질문을 오롯이 관객에게 떠넘긴 기분이 들었다.
예전 한 기업 광고에서 이런 카피가 있었다. “모두 다 ‘예’라고 말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이 광고가 나왔던 때가 1998년이니 20년 전이다. 나 역시 젊은이였던 이 시기에 이 광고 카피는 지극히 나라는 젊은이에게는 당연한 문장이었다. 그러나 20년이 지나고 40대 중반의 나이에 <디트로이트> 영화를 보는데 이 광고 카피가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리고 영화 속 개인에게 벌어진 너무나 끔찍한 사건이 그 날의 사건보다 그 이후의 트라우마를 특별한 대사 없이 삶의 형태를 투영하는 화면과 자막으로 묵묵히 나타내 준다. 힘 있는 감독이 만들어낸 인권에 대한 차별에 대한 냉혹한 이야기…
대단한 영화이지만 내 마음속에는 ‘우리나라는 뭐야?’라며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51년 전 미국의 한 도시에서 일어났던 작다면 작은 집단에 일어났던 사건을 한편의 다큐멘터리처럼 만들어서 관객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영화를 통해서 사건 자체를 구체적으로 외부에 알리는 계기가 된 셈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작은 집단으로 대체될 수 없는 너무나 대규모 집단에게 더욱 무섭고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었다. 왜 영화를 보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세월호 사건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는지는 모르겠다. 진상이 밝혀졌지만 아직도 모호한 팩트. 그리고 설사 팩트가 밝혀졌다고 해도 사건의 당사자들과 남겨진 사람들에게 남겨진 트라우마의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저 영화 속처럼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오늘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벌어진 인생의 비극적 전환점. 그 고통에 대해서 어떻게 감히 내가 논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일련의 사태들이 과연 개인의 분노에 관한 문제인지 집단의 광기에 휩싸인 행동인지… 한 개인이 군중에 휩싸여서 나도 모르게 했던 행동이라고 논리화 하기에는 핑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 호텔 씬보다 재판 장면에서 더욱 화가 난 이유가 끝없는 둘러대기와 핑계 때문이었다)
나는 여전히 순수하고 용기 있게 행동할 수 있을까? 집단의 광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을까? 분명히 비틀어지고 왜곡된 잘못을 저지르는 군중 속에서 어떻게 올바른 행동을 실천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연속적인 질문과 고민을 하게 했다.
개인의 신념이 극에 달할 때, 하지만 그 신념이 선한 영향력의 반대에 서있다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분노와 광기에 둘러싸인 신념은 다른 사람에게 완전한 피해를 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장본인은? 파멸이지… 겉으로는 꿋꿋이 살아갈지 모르지만 타인에게 극악의 고통을 준 사람이라면 영혼의 파멸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당연지사 아닌가…
그 외 이야기
1 : 메이즈 러너 1편에서도 전 세계 찌질이 청년 대표로 나왔던 폴 윌터(갤리 役)가 이 영화에서도 최고의 진상 멘탈 찌질이 악역 필립 크라우스로 나온다. 혹자는 연기를 정말 잘한다고 좋아하지만, 난 영화 내내 감정이입이 돼서 그저 밉상으로만 보였다. 아무리 역할이라고 해도 당분간 이 배우는 별로 좋아할 것 같지가 않다. 밉상이다 보니 인상마저 맘에 안 든다.
2 : 영화는 좋았다. 단 러닝타임이 너무 길었다. 좀 더 다큐멘터리에 치중했다면 영화 러닝타임을 120분 정도로 잡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 늘어진다는 기분보다 그냥 길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이야기에 울고 불고 신파조 따위 없이 최대한 감정을 배제시킨 그 연출력은 정말로 높이 사고 싶다.
*글 : 취미발레 윤여사 윤지영
*사진 출처 : Daum영화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로 시사회 관람 후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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