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케이크메이커> 인생에 녹아 스며든 사랑의 농도

달콤하면서도 깊이 있는 위안


#04. 케이크메이커(The Cakemaker)

인생에 녹아 스며든 사랑의 농도 


 

*영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항상 그랬듯이 제목만 알고 보러 간 영화다. 다만 마음속 바람이 있었다면 제목인 <케이크메이커>에서 시사하듯이 화려하게 눈이 즐겁고 영화를 보는 내내 ‘저 케이크 먹고 싶어!’라는 원초적 자극이 난무하지 않았으면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이런 바람에 아주 적합한 영화였다. 이 영화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달달한 디저트인 케이크로 일본 예능 프로그램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케이크를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적막한 화면 속에 묵묵히 케이크와 쿠키를 굽는 행위 가운데에는 갖가지 인생의 여러 교집합이 은근하게 스며들며 다른 형태로 등장한다. 


 


인생과 사랑에 관한 영화다.

인생과 사랑에 관한 영화다. 분명 영화의 주제는 사랑인데 어디서부터 사랑인지 명확한 규정은 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살면서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면 스킨십을 거쳐서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하고 그리고 서로의 일부를 소유하며 나아가서는 정당한 법적 구속인 결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위에 열거한 방식은 사랑하기에 가능한 행위이자 과정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만이 사랑이라고 규정짓기에 사랑의 범주는 상당히 넓고 오묘하다.  

주인공인 독일인 파티쉐 토마스는 오렌과 연인 사이가 된다. 오렌은 아들과 아내가 있는 이스라엘 남성이다. 유부남인 오렌은 그렇게 베를린에 동성 애인을 두게 되고,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오렌의 죽음을 알게 된 토마스는 상실감과 알 수 없는 감정에 애인인 오렌의 삶의 궤적에 한 걸음씩 들어오게 된다. 여기서부터 죽은 사람이 아닌 살아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독일인 토마스는 오렌의 나라인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와서 유대인들인 그의 가족 근처에 맴돌게 되고, 그의 아내인 아나트의 카페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만의 방식으로 오렌의 흔적을 더듬어 가고, 주변 사람들을 묵묵히 돕고, 직업이 파티쉐인 그는 쿠키와 케이크를 만들며 음식을 통해 서서히 오렌의 가족과 위안을 주고받는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들 간의 묘한 감정의 교차가 일어나고 그들 간의 행동에서 ‘썸을 탔네, 사랑을 했네, 누가 누구를 더 좋아하는 것 같네’ 같은 이분법적인 해석은 별 의미가 없다. 


 

어떤 운명의 만남이었을지 모르지만 연인이 되는 두 사람 (출처 : 구글)



유부남이 해외에서 일하면서 동성 애인과 살림을 차리고, 불의의 사고로 죽자, 남겨진 동성 애인은 죽은 애인의 가족 곁에 맴돌다 부인과 사랑에 빠지고, 나중에 이런 상황의 전말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 영화 스토리를 한 문장의 글로 읽으면 흔히 말하는 막장도 이런 막장 스토리가 없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동안 단 한 번도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있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극히 자연스럽고 여러 사람의 인생의 단막극이 다른 사람의 인생과 겹치면서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거의 대사가 없는 주인공 토마스(팀 칼코프)는 가끔씩 감정을 드러내는 입꼬리가 올라갈 듯 말듯한 무표정에 가까운 연기를 보여주는데 그 속에서 그의 마음이 읽힌다. 오렌의 아내인 아나트(사라 애들러)의 자연스러움은 영화가 아니라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 들 정도다. 굳이 예술영화, 상업영화를 나눈다는 것이 의미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익숙한 미국 영화 스타일은 아니다. 할리우드 대부분의 영화는 초반을 보는 순간 결말이 예상되는… 이미 많은 관객들은 뻔한 클리셰를 간파하고 있다. 그런데 독일, 이스라엘 합작 영화인 <케이크메이커>에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영미권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이야기를 보여 준다. 나 역시 이스라엘의 샤밧이나 코셔 같은 유대교 교리를 이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됐다. 표면으로만 알고 있었던 독일과 이스라엘의 민족적 갈등은 훨씬 더 복잡 미묘하게 누적되어 왔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 가운데 토마스가 만들어내는 케이크나 파이는 남편을 잃고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아나트에게 삶에 대한 통로이자 감정의 위안으로 다가온다. 

감독은 케이크를 먹는 장면이나 음식을 통해서 관능적이고 성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고 했지만, 관객 입장에서 내가 본 장면은 에로틱하다기보다 상실의 쓰디쓴 감정을 조금 덜어내는 회복의 장면으로 보였다. 아나트의 카페에서 진열된 베이커리는 달콤한 휴식이 아닌 토마스가 오렌을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마음을 담아 묵묵히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제목인 <케이크메이커>가 내용에 잘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케이크메이커> vs <셰이프 오브 워터> vs <브로크백 마운틴>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 장면에서 다른 영화가 중복돼서 보였다. 오마주나 카피라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내가 비교했던 장면은 다음과 같다. 우선 토마스가 여러 가지 초콜릿 롤케이크와 살구 파이를 만드는 장면은 얼마 전 봤던 <셰이프 오브 워터>에 나오는 맛없는 초록 파이를 팔면서 친절을 위장한 허세로 가득한 점원이 나오던 파이 가게를 떠올렸다. 파이라는 아이템은 같지만 완전 다른 결과물을 보여주는… <셰이프 오브 워터>에 나오는 파이는 가식과 허세의 상징이었다면 <케이크메이커>에 나오는 파이와 쿠키는 위안과 휴식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두 번째, 오렌의 엄마가 토마스에게 샤밧 음식을 가르쳐주며 함께 만들다가 죽은 아들의 방을 보고 싶냐고 하면서 문이 열려 있으니 가서 보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브로크백 마운틴>의 마지막 즈음에 잭(제이크 질렌할)의 집에 찾아온 에니스(히스 레저)에게 죽은 잭의 방이 어딘지 알려준 엄마의 대사와 묘하게 맞물렸다. 죽은 아들에 대한 엄마의 감정 표현 방식도 비슷했고, 동성 애인을 대놓고 인정할 순 없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들을 사랑했던 공통분모가 있는 사람이기에 내면의 동질감을 나타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개인적인 공간, 아들의 방을 보라고 허락하는 장면은 용서와 이해가 포함되어 있다. 


<셰이프 오브 워터>에 나오는 맛없는 초록색 키라임 파이가게 (출처 : 구글)
좌 : <케이크메이커> 오렌 엄마가 토마스에게 아들 오렌 방에 가보라는 장면, 우 : <브로크백 마운틴> 잭의 방을 찾은 에니스 (출처 : 구글)



우리에게 그렇게 피부로 와 닿지 않았던 이스라엘(유대인)과 독일의 관계. 지리적으로 멀지 않지만, 한때 정복자와 참혹한 대학살의 피해자였던 두 나라 사이에는 민족적 상처가 남아있다. 개인 간의 사랑과 연대의 감정은 생길지 몰라도 개인이 포함된 사회에서는 갈등과 이질감이 생길 수밖에 없는 두 나라다. 이스라엘에서 규정하는 샤밧, 코셔 음식 등 유대 종교적 율법에는 자기들만의 규정이 있다. 강한 단일 민족성은 타인에 대해 배타적이고, 자기들만의 세상만을 견고하게 쌓아간다. 그 가운데 완전한 타인인 독일인 토마스의 등장은 오렌의 부인인 아나트와 그의 가족의 견고한 커뮤니티에 틈이 생기게 한다. 틈이 생길수록 그 구성원들(모티 삼촌, 아브람 랍비 등)은 당황하며 그를 밀어내려 하지만, 토마스의 묵묵한 케이크메이커 기질로 인해 가족 근처에서 일을 하고, 결국 가족 구성원 역시 그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사실 이 과정은 견고한 커뮤니티의 해체와 붕괴가 아닌 가볍게 손을 건네서 타인을 받아들이며 견고했던 벽이 유연 해지는 것과 유사하다. 

 

 반죽에 대한 인상적인 대사가 나왔던 이 장면 참 좋았다. (출처 : Daum 영화)



영화의 결말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다만 필자는 좀 더 평온한 쪽으로 결론지었다.  

인생은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 때로는 즐겁고 짜릿하고 행복한 감정을 느낄 때도 있지만, 때로는 상실감과 모멸감의 시간을 지날 때도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잔인하고도 고마울 만큼 시간은 묵묵히 흘러간다. 그리고 그 켜가 쌓여가며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의 인생이 완성돼간다.  

영화 속 토마스는 애인이었던 오렌 앞에서도 정성을 다해서 쿠키 반죽을 치대면서 만들곤 했었다. 그리고 나중에 오렌의 아내인 아나트에게 반죽하는 법을 알려주는 장면에서 이런 말을 한다. “손을 따뜻하게 하라. 반죽이 너무 차가워지면 쿠키를 만들 수가 없다.” 자신의 손의 온기로 주변을 좀 더 따뜻하게 변화시킨다면… 비록 다른 사람이 그 온기를 애써 외면하더라도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인생은 서서히 만들어진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정성이 담뿍 들어간 블랙 포레스트 케이크 한 조각과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고요한 카페에서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처음의 내 바람은 여지없이 무너진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영화를 잘 본 것인지? 현란한 케이크의 향연이 아니었지만, 앞으로 블랙 포레스트 케이크를 먹을 때면 가장 먼저 이 영화가 떠오를 것이다. 달콤하면서도 깊이 있는 위안이 필요한 순간에…


풍미가 가득한 블랙 포레스트 케이크가 그립다 (출처 : Daum 영화)



*글 : 취미발레 윤여사 윤지영

*사진 출처 : 영화 <케이크메이커> 구글 웹사이트, <The Cakemaker> 공식 웹사이트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로 시사회 관람 후 올린 글입니다.



취미발레 윤여사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yoonballet_writer/


매거진의 이전글 <몬태나> 두려움. 증오의 또 다른 이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