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변산>_인생 뭐 별거 있나?

살아 숨 쉬는 동안은 어떤 엔딩도 없는 진행형이다.


#06. 변산

인생 뭐 별거 있나? 살아 숨 쉬는 동안은 어떤 엔딩도 없는 진행형이다.


 

나는 힙합을 잘 모른다. 텔레비전을 즐겨보지도 않는 편이다. 유행하는 드라마, 인기 있는 연예인에게도 별로 관심이 없다. 텔레비전보다는 라디오를 듣고 보통 팝이나, 모던록, 클래식은 아주 좋아하지만 가사가 들리지 않는 힙합 중 특히 랩은 그저 누가누가 가사 더듬지 않고 말 빨리하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내가 한때 좋아했던 래퍼는 랩의 고조할아버지쯤 되는 에미넴이다. 2000년대 초반에 반짝 참 열심히 듣곤 했었다. 랩이라고 하면 두운이건 각운을 맞춘 라임에 지독하게 신세 한탄을 하거나 상대를 디스하는 장르의 음악이라고만 여겼다. 그래서 요즘 어떤 래퍼가 유명한지도 모르겠고, 우연히 켠 TV에서 도끼라는 래퍼가 돈을 엄청 벌었다고 하는데 이 세상에 나 같은 사람들만 있으면 래퍼 도끼도 굶어 죽겠다 싶었다.  

한 1년 전쯤이나 됐을까 주말에 아이들은 모두 잠들고 혼자 여유 있고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며 TV 방에서 나른하게 채널 돌리기를 하고 있었다. 나같이 TV를 잘 안 보는 사람이 오랜만에 TV를 보면 도대체 뭘 봐야 할지 몰라서 여기저기 틀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그러다 딱 얻어걸린 프로그램이 바로 쇼미더머니였다. 나에게는 너무나 낯설기만 한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 그런데 딱 기분 좋게 마신 맥주 한잔의 효과였는지 이 날은 아주 늦게까지 이 프로그램을 봤다. (물론 그 이후로는 딱히 챙겨 보지는 않았다) 내가 끝까지 본 그날의 배틀은 두 사람이 하나의 주제어를 가지고 각자 노래를 만들어서 관객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나 신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랩 배틀의 주제어는 ‘아버지’였다. 나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그 프로그램을 끝까지 봤고, 치열하게 랩을 작사하는 과정을 보고 그들이 뱉어내는 그 가사를 자막으로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던 기억이 있다. 술 한잔의 알코올 기운이었는지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라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심지어는 그날 랩을 쏟아냈던 래퍼 두 명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 날 내가 생각한 랩은 누가누가 말 빨리하나가 아니라 하나의 시요,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정서를 독백하는 것이다. 단, 달콤하고 사르르 녹는 솜사탕 같은 언어가 아닌 학과마다 하나씩 있는 삐딱선 츤데레 선배 같은 말투의 고백인 셈이다.


영화에서도 2인 배틀이 등장한다. (출처 : Daum 영화)



*영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홍대 클럽의 힙합씬이다. 래퍼 심뻑은 Mnet의 쇼미더머니를 6년 동안 참가하지만 번번이 3라운드의 장벽을 넘기지 못한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나가지 않을 땐 편의점, 발렛파킹 알바를 하며 고시원에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흔한 연예인 지망생이다. 래퍼 심뻑은 촌구석 부안의 한쪽을 차지하는 변산 출신의 김학수(박정민)라는 청년이다. 어느 날 그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오고, 10년 간 연락을 끊고 살았던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병원으로 계시니 내려오라는 내용이다. 김학수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 학수와 어머니를 버리다시피 하고 건달 짓에 외도로 딴 집 살림을 차리고, 학수의 어머니는 젊은 날 암으로 세상을 떠나지만 부인의 장례식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사람이다. 학수가 이런 아버지에게 남은 감정은 증오뿐이다. 그렇게 고향에 내려갔는데 전화를 한 장본인 고향 친구,  동창생 선미(김고은)와 재회하게 되고, 그 외 잊고 싶었던 아니 잊으려 노력했던 학수 주변의 모든 인물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과의 여러 일에 얽히면서 지긋지긋한 과거가 현실과 오버랩돼서 벌어진다. 일상에서 저렇게 일이 꼬이고 막장 코미디 같은 스토리가 있을까 싶지만, 보면서 그 뒷이야기가 궁금해지게 만든다.





영화의 전체 스토리는 지극히 평범하다. 그 가운데는 평범한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풀어내며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가 평면이 아닌 반입체적 인물로 살려내는 재주를 가진 이준익 감독이 있다. 그리고 현실은 갑갑한 찌질이지만 가오만큼은 확실히 잡고 싶은 학수 역을 배우 박정민이 맛깔나게 연기한다. 이미 연기 잘하는 배우로 정평이 난 김고은은 못생겨 보이는 게 아니라 평범해 보이기 위해 체중을 8kg이나 늘려가며 선미 역할에 임했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배우들은 연기를 잘하려고 애쓰지 않고 영화 속 인물로 그냥 녹아있다. 영화를 보다 보면 나 역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좁디좁은 동네 변산 바닥을 마치 꿰뚫고 있는 것처럼 등장인물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착각마저 든다. 영화는 관객에게 긴장하고 집중해서 영화를 보라고 권하지 않는다. '이게 무슨 내용인지 지켜봐야지~'라고 집중할라치면 예상치 않은 곳에서 헛웃음이 나올만한 블랙코미디 요소가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일부는 진짜 웃기기도 하고, 일부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영화는 계속 관객의 긴장을 풀어준다. 어느덧 영화관에 있는 모든 관객은 다 같이 와하하~ 웃으며 영화를 보게 되는 상황이 연출됐다. 참으로 오랜만에 극장에서 한마음으로 웃어보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 감독도 이런 것을 바라고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 <변산> 공식 포스터 (출처 : Daum 영화)


그 가운데 영화는 현대판 시(詩)라고 할 수 있는 랩이 곳곳에 나오며 등장인물의 마음을 대변한다. 힙합랩은 상당히 도전적이지만 대중음악에서도 완전한 주류가 아니라서 마니아층만이 좋아한다고 볼 수 있다. 분명 주류가 아니었는데도 질긴 민들레 뿌리처럼 대중음악의 한 콘텐츠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버티기와 맞짱뜨기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주인공 학수는 래퍼로 성공하고 싶어서 6년 동안 쇼미더머니에 출연한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오히려 학수는 자신의 인생에서 겪었던 많은 상처와 아픔에 정면승부를 피해 왔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아버지가 그랬고, 고향 변산이 그랬고, 어릴 때 받은 외로움과 버림받아 남아있음에 대한 증오가 그랬다. 그것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물리적, 정신적 귀싸대기를 날려주는 사람은 학수를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선미다. 그녀는 학수를 향해 뻔뻔하고 당당하게 행동하지만 그를 향한 사랑과 고마움을 그녀만의 내밀한 방법인 글쓰기를 통해서 해소한다. 그러다 그녀는 진짜 작가가 된다. 하나를 오롯이 바라본 사람에게 의외라고 여길 만큼의 놀라운 결과가 포상으로 주어진 셈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심각한 교훈을 남겨주지 않는다. 오히려 삶에 있어서 진짜 한고비를 넘기 위해서는 어깨에는 힘을 빼지만 아랫배 중심에 힘을 주고, 눈으로는 그 문제를 똑바로 바라보라고 이야기한다. 학수와 동네 건달이자 친구인 용대와의 갯벌 속 진창 싸움은 단순히 용대에서 벗어나기 위한 학수의 몸부림이라기보다 학수가 그동안 외면하고 피해왔던 자신 인생의 모든 것들을 비로소 직면하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화해로 바뀌며 '결국 가족밖에 없어'라는 윤리적 가치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상황은 결국 자기가 그 문제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어른으로 성장 해나갈지에 대한 갈림길에서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잘할 수도 있고, 때로는 실패할 수도 있지만, 성공 여부와 상관하지 않고 자기답게 인생을 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영화의 화자(話者)는 학수 역의 박정민이지만 선미 역의 김고은은 박정민을 든든히 받쳐주는 기둥 같은 연기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영화를 보다 보면 여자 배우가 반짝거리며 빛나기 쉽고, 여배우 역시 자기가 의도하지 않아도 그렇게 보이기 쉬운데 <변산>에서 완벽한 주인공은 학수다. 그리고 보통 여배우가 빛나기 위해서 남자 배우가 든든히 받쳐주는 그 역할을 김고은이 하고 있다. 예전 어떤 기사에서 배우 김고은은 연기를 물론 잘하지만 남자 배우를 잘 만나서 더 빛이 나는 운 좋은 여배우란 것을 본 적 있다. 데뷔는 파격적인 <은교> 상대 배우는 박해일, 김무열, 이후 드라마 <도깨비>에서는 공유, <치즈 인 더 트랩>에서는 박해진이었다. 그러나 영화 <변산>에서 박정민과 김고은은 외형적으로 보이는 멋있음, 예쁨을 과감히 버렸다. 그렇다고 막 못생기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외형적 요인을 빼고 영화 속 인물 그 자체로 자신들을 드러낸다. 학수 역의 박정민이 희로애락 온갖 감정을 나타내야 하는데 반해 김고은은 감정을 안으로 응축시키는 연기를 해야 한다. 그래도 마냥 우울하고 심각하게 보이지 않는 이유가 엉뚱함과 발랄함, 그리고 래퍼보다 랩을 더 잘하는 시골 아가씨 반전의 장면 등에서 통쾌한 한방을 날려준다.


 

영화 내내 과거와 현재의 교차 편집이 이루어져 현재 벌어진 많은 사건의 당위성을 설명해준다 (출처 : Daum 영화)




내 인생에 얼마나 당당하게 맞짱 뜰 수 있을까?

성공과 화려함을 쫓아 상경한 학수는 성공의 꼬투리도 못 잡고 있지만, 변산 땅을 벗어나지 않고 도시적인 디지털보다 여전히 아날로그의 방식인 연필로 글쓰기를 선호하는 선미는 학수가 꿈꿀 수도 없는 성공을 한 아이러닉 함도 보여준다. 영화는 어떤 성공이 더 가치 있는지 주입하지 않고, 어떻게 내가 하고자 하는 목소리를 내고 어떻게 그것을 붙잡고 끝까지 갈 것인가에 대해 알려준다. 비단 젊은이들에게만 잘 살아보라는 것이 아니다. 학수 아버지 유언처럼 진짜 유언 같지도 않은 유언이지만, 알고 보면 정말 필요한 이야기인 아이러니. 그것이 인생이다.  

 


매일 똑같이 뜨고 지는 태양, 그 커다란 하늘을 매일 다른 노을로 가득 채울 수 있는 태양의 다채로움과 경이로움을 바라보며 생각해보자. 어제나 오늘이나 다 똑같은 하루라고 여기지 말고 지금 펼쳐진 하루를 어떻게 채워갈 것인가. 분명 내일은 오늘의 반복이 아닌 하루에 또 하루의 켜가 쌓여간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잠시 쉬는 휴식은 필요하다. 그러나 내 앞에 있는 무언가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지 말고,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 생각하자.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인생이라는 문제집을 차근차근 풀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꼭 이야기 하고픈 한 가지! 누구의 마음속에나 시(詩)는 존재한다.




*글 : 취미발레 윤여사 윤지영

*사진 출처 : Daum영화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로 시사회 관람 후 올린 글입니다.



취미발레 윤여사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yoonballet_writer/


매거진의 이전글 <디트로이트>_집단의 광기와 개인의 분노 사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