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 중에 누가 제일 예뻐?
무례함을 뛰어넘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질문
"애들 중에 누가 제일 예뻐?"
셋 중에 누가 제일 예뻐?
셋째를 낳고 한참 육아를 할 때였다. 내 주변의 인물이 나에게 던진 질문이다. 너무나도 진지하게 물어봐서 나도 모르게 진지하게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엄마가 된 이후로 내가 받은 가장 멍청한 질문 중 하나였다. 이건 질문의 논리 자체가 틀린 것이다. 당시 나는 세 아이가 전부 다른 모양의 사랑으로 다가오는데 어떻게 순위를 매기냐고 당연히 다르게 다 예쁘다고 했고, 상대는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마음이 끌리는 아이가 있지 않겠냐고 나에게 반문했다.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도 정말 무례하면서도 멍청한 사람이다)
상대를 생각하면 불행 중 다행은 이 질문을 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번의 출산으로 순간 기억력 세포가 줄어들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멍청한 질문을 던진 사람과 큰 싸움이 벌어질까 봐 내 성격을 아시는 하나님이 그 상황의 기억을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라. 만약 내가 그 멍청한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래도 셋 중 누구가 제일 예쁜 것 같다고 했다면, 나는 그 대답으로 인해 진짜 그 아이를 제일 예뻐한다고 결론짓게 되는 것이다.
자녀 입장에서 어릴 때 받는 난처한 질문이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다. 내가 어릴 때도 주변 어른들은 그걸 꼭 물어봤고, 나는 답변을 하느라 쩔쩔맸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아빠, 엄마 중 누가 더 좋은지 고르는 것은 좀 낫다. 하지만 부모에게 어떤 자식이 가장 예쁘냐고 묻는 질문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례함을 뛰어넘은 가장 멍청한 질문이라고 단언한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첫 장면부터 다소 낯설고 불편한 이미지로 시작한다. 실제 심장수술의 장면을 영화에 삽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장면은 공포스럽기보다 경이롭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신의 심장을 실제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의 심장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몸 안에서 펄떡거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살아있음에 안도감을 느낀다.
성공한 외과의사인 스티븐(콜린 파렐)은 안과 의사인 아름다운 아내 안나(니콜 키드먼)와 딸, 아들을 둔 안정적인 가정을 가지고 있다. 스티븐이 챙기는 소년 마틴(배리 케오간)이 등장하는데 둘 사이가 미묘하다. 멘토와 멘티라고 하기에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나이 차이를 극복한 동성 연인이라고 보기에도 뭔가 들어맞지 않는다. 스티븐은 마틴을 챙기지만 둘의 관계는 어둡고 은밀하고, 막상 마틴이 거리감을 없애려고 하면 스티븐은 마틴을 밀어낸다. 영화를 보다 보면 나오는 이야기지만, 스티븐은 마틴의 아버지의 주치의였고, 심장수술을 하는 중에 사망한다. 뭔지 모르게 스티븐이 마틴에게 쩔쩔매는 모습에 이 사람의 수술 과정에 뭔가 꺼림칙한 일이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어느 날 스티븐의 아들인 밥(서니 설직)이 원인불명의 하반신 마비가 온다. 아들의 믿기지 않은 증세로 부부는 혼란에 빠지게 되고, 둘 다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병명에 대한 명확한 진단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때 마틴이 갑작스레 밥의 병문안을 오고, 스티븐을 불러내서 마치 게임의 룰을 설명하듯이 이야기를 쏟아낸다.
“당신이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당신의 가족 중 하나가 죽어야 균형이 맞겠죠? 첫 번째 하반신 마비, 두 번째 거식증, 세 번째 안구출혈, 마지막은 사망, 당신은 죽을 수 없고, 당신의 가족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죽어야 이 상황은 끝이 난다. 결정은 당신이 직접 해야 하고, 만약 한 명을 죽일 결정을 하지 않으면 모두 앓다가 죽는다. 단, 3번인 눈에서의 출혈이 시작되면 몇 시간 내로 사망하니 그 단계에 진입하기 전에 빨리 결정하라.”
이 믿기지 않는 상황에 스티븐에 마틴을 미친놈 취급을 하지만, 거짓말처럼 밥은 거식증 증세를 보이고 딸 킴(래피 캐디시)도 아들과 같은 증세를 보이게 된다. 스티븐은 아내에게 이 사건을 이야기하고, 이 모든 상황이 스티븐으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 안나는 더 이상 남편으로 그를 존중하지 않는다. 아내인 안나가 남편이 마틴의 아버지의 심장 수술을 한 기록을 알기 위한 과정에서 심증적이지만 스티븐은 그 수술을 집도하기 전에 음주를 한 정황이 포착된다.
이렇게 황당하면서도 끔찍한 상황은 계속되고, 마틴이 스티븐 가족의 감정의 모든 것을 쥐락펴락 하게 되고, 결정의 시간은 다가온다. 스티븐의 잘못으로 가족이 이런 대가를 치러야 하는 불공정한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결정권을 지닌 스티븐 앞에서 가족들은 모두 자기를 살려달라고 은연중에 목숨을 구걸한다. (개인적으로 영화의 이 장면은 끔찍한 씬이 아니었지만 대사 내용 자체가 불편하다 못해서 구역질이 날 정도로 불쾌했다) 영화의 결말은 반전이 아니라 불편함이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인간의 기본적 윤리를 거침없이 난도질하는 시퀀스로 내내 끌고 가는 감독의 집요함 만큼은 인정한다.
멍청한 선택을 해야 하는 비극적 상황
이 영화는 현재를 배경으로 마치 실제로 벌어진 일 같이 묘사를 하지만, 영화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은 상징과 비유로 가득 찬 신화의 재해석이다. 감독인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그리스 사람이다. 에우리피데스가 쓴 고대 그리스 비극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을 바탕으로 영화의 각본을 완성했다. 좀 우스개 소리로 하자면 한국의 괴기스럽고 비극적인 민담인 여우누이, 장화홍련전 등을 한국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는 식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는 낯선 이야기지만, 그리스인들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들었을 법한 이야기다.
영화의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The Killing of a Sacred Deer>는 우리나라에서 이야기한 그냥 사슴 죽이기와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지닌다. 그렇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희생 제물을 의미한다. 속죄를 하기 위한 희생 제물은 흠 없고 순결한 짐승을 바친다. 그 이전에는 부족에 따라서 실제로도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이자 겉으로는 성공했지만 결국 한낱 나약한 인간의 표본으로 나오는 스티븐의 지울 수 없는 죄로 인해 희생 제물이 선택되는 과정을 묘사했다. 다만 그 대상이 아이들이고 게다가 아버지가 그 대상을 결정해야 한다는 감정의 극단을 향해서 가는 것이다.
영화의 감정을 극으로 몰고 가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두 가지 요소는 카메라 워크와 음악이다. 카메라 워크는 롱테이크가 유난히 많고 인간의 시선(human eye view)이 아닌 약간 높은 각도에서 인간을 향해 내리꽂는듯한 카메라 워크다. 특히 스티븐이 병원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씬은 소실점(vanishing point)이 있는 정대칭의 구도로 앞모습보다는 약간 위쪽에서 뒷모습을 바라보며 따라가면서 불안감을 조성하는 형식이다. 마치 카메라가 스티븐의 일거수일투족을 미행하는 것 같다. 그리고 마틴이 뭔가 일을 벌이는 듯한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현악기의 찢어지는 듯한 고음과 피아노 건반을 마구 내리치는 저음이 대조된다. 유난히 정돈되어 있는 백색의 기운 가운데 신경을 자극하는 음악이 음울한 기운을 복선 해주는 역할을 한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분명히 영화적 상상적 요소를 극대화해서, 예쁜 동화가 아닌 냉혹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분명 영화는 잘 만들었다. 배우들의 감정을 배제한 열연(모든 배우들의 대사마저 건조하고 딱딱하지만 이것 역시 감독의 의도인 것 같다) 적재적소에 이용되는 영화적 소품들,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시나리오로써는 허술함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구조다. 다시 말하면 감독이 영화라는 장치 속에서 자기가 사용하고 싶은 재료로 마음껏 실험을 하고 있다. 관객은 관객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불편함을 지켜봐야 하는 수고로움을 겪어야 한다.
마치 이것은 영화 속 스티븐이 원하지 않지만 마틴의 요구를 억지로라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비슷하다. 스티븐이 겪었던 괴로운 딜레마와 불편함을 영화 보는 내내 관객이 고스란히 떠안도록 했다. 영화적 장치는 이러하다. 그러기에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전작 송곳니(2009), 더 랍스터(2015) 등에서도 보여줬던 불편함과 미지의 답답함을 관객의 몫으로 남겨놓는다. 분명 아주 영리한 감독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 영화적 내용에 관한 관점은 아무리 그리스 비극, 신화의 재해석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딱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어쩌면 고대 이야기를 재해석했다고 해도 영화의 리얼리티가 강해서 영화적 프레임에 속지 않기 때문에 보는 관객이 더 화가 나고 불편할지도 모른다. 그 점에서도 감독의 기획력은 탁월하다고 본다.
당신의 자식 중 어떤 아이가 제일 예뻐보다 한 술 더 뜨는 멍청한 질문. 당신 자식 중 어떤 아이를 죽일 거야?
이런 영화적 장치에 ‘생명에 대한 인간의 추악한 본성’, 뭐 이 따위의 말장난은 집어치우자. 나도 리뷰를 쓰는 입장이지만, 가끔 도를 넘은 예술가들의 행위에 모든 장단을 맞출 의향은 없고, 평론이랍시고 현학적인 말장난을 하는 것도 딱 질색이니… 아무리 기승전 메타포로 이루어진 영화라고 해도 개인적 의견을 말하자면 '솔직히 감독… 막가도 너무 막갔다.'
영화니까 가능하고, 영화니까 그 이상의 현실과 끼워 맞추기의 분석 따위는 의미 없다고 본다. 아주 가끔씩 이런 영화로 인간 내면의 저변에 깔려있는 서늘한 감정을 살짝 건드려보는 건 괜찮지만, 너무 자주 그럴 필요는 없다. 가끔씩은 불편함은 감내하지만 가뜩이나 현실 속에 사는 것도 분주한데 감당 못할 불편한 감정을 후벼 파서 기나긴 여운을 남기고 싶지는 않기에…
*글 : 취미발레 윤여사 윤지영
*사진 출처 : Daum영화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 예매권 관람 후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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