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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실 비치에서_여백은 부재와 다르다

최고의 재료로 요리를 망친 경우


#11_체실 비치에서(On Chesil Beach)

여백은 부재와 다르다



어쩌면 식상한 클리셰가 난무한 영화보다 감독의 입장에서 더 어려운 건 여백이 존재하는 영화다. 잘 만들면 수작(秀作)이 될 수 있지만 여백의 밀당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앉아 있는 관객에겐 고역이 될 수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요즘 영화나 연극, 드라마에서 잔뜩 생각하게 하고 여백이 대부분인 작품을 놓고 평론에서 좋게 말할 때 ‘깊은 울림’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아무 데나 할 말 없으면 그놈의 ‘울림’이란 단어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진정성’이란 단어만큼 식상 리스트에 올리고 싶은 단어다. 진짜 깊은 울림인지 공허한 울림인지… 역시 평론은 주관적 입장이 강한 것이라서 어떻다고 말하기 뭐하지만, 이번 작품 역시 관람 전에 큰 기대를 하고 본 영화기에 마지막을 치달을 땐 공허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렇다면 이제 작정하고 영화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여태까지의 영화평과는 다르게 대놓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래도 관람을 원하는 분이라면 여기서 글을 닫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번에는 스토리를 풀어가는 방식을 이야기 하지 않고는 논평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원작은 영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하나인 이언 매큐언(Ian McEwan)의 동명작 <체실 비치에서_On Chesil Beach>이다. 중편 소설의 분량으로 작가는 작품이 다른 사람 손에 각색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 영화화될 때 본인이 직접 각색을 했다. 이언 매큐언은 70세의 노장으로 영국의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한 영향력 있는 작가다. 그의 베스트셀러 소설 속죄(Atonement, 2001)는 동명의 영화 <어톤먼트>로도 제작이 됐다. 작가 자신이 보냈던 젊은 시절을 소설 속에 자연스럽게 등장시킨다. 그리고 2000년 대 이후의 현재 시점에서 그 시대에 관한 상황을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설명해준다. 문체를 보면 겉으로는 깐깐하지만 왠지 마음 깊은 곳은 따뜻할 것 같은 할아버지가 젊은이들에게 해주는 이야기 같은 흐름이다. 소설 속 등장하는 인물의 심리 묘사에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시니컬하게 팩트를 이야기 하지만 그 건조한 문체가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그가 각색한 영화에 더욱 기대를 했을지도 모른다.


중편 소설이었다면 영화의 러닝 타임도 110분이 아니라 좀 더 짧게 잡았으면 어떨까 싶었다. 아님 러닝 타임을 장편 영화처럼 잡았다면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스크린으로 옮기는 데 급급하지 말고, 소설과는 확연하게 차이를 두는 각색이 어떨까 싶기도 했다.

소설을 영화화할 때 원작자들은 자신의 이야기가 변질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 마음만큼은 나도 작가로서 충분히 이해한다. 누군가 내가 한 이야기를 토대로 뭔가를 슬그머니 갖다 얹으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작가들은 소설을 읽는 독자가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장면과 스크린에서 표현되는 결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이쯤에서 소설을 영화화했다가 대표적으로 폭망한 영화를 개인적 관점으로 몇 개 나열해볼까 한다.

1. 눈먼 자들의 도시(2008, 주제 사라마구 著,): 소설 첫 페이지부터 강렬한 문체와 엄청난 흡인력을 지녔다. 읽는 내내 끔찍한 상황에 나마저 함께 내몰리는 것 같은 착각에 휩싸인다. 인간의 저변에 깔려 있는 보고 싶지 않은 본능의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휘몰아친다’라는 단어가 딱 적당한 소설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이 대단한 소설을 영화에 그대로 옮기는데 바빴고, 뭔가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고 영화 내내 핸드헬드 카메라에 전부 롱테이크로 촬영을 했다. 보면서 멀미 나고, 편집은 어설프고, 내가 좋아하는 배우 줄리앤 무어와 마크 러팔로가 출연함에도 불구하고 기억도 나지 않는다. 힘 있는 메시지가 담긴 소설을 영화에서는 B급 좀비 호러물로 바꾼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2. 펠리컨 브리프(1993, 존 그리샴 著): 90년대 한창 인기 있는 소설가로 활약했던 존 그리샴의 베스트셀러 동명소설 펠리컨 브리프를 스크린에 옮겼다. 소설은 대중적이지만 충분히 스토리로도 재미있었는데, 영화에서는 그 속도감을 표현하지 못했다.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만 본다면 재미있게 느꼈을지 모르지만, 소설을 먼저 본 나로서는 사랑스러운 배우 줄리아 로버츠와 지적인 배우 덴절 워싱턴이 열연을 해도 소설에서의 짜릿함을 볼 수 없었다.


3. 다빈치 코드(2006, 댄 브라운 著): 2003년 전 세계를 휩쓴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를 영화화했다. 워낙 소설이 인기가 있어서 아마 영화를 봤던 대부분의 관객이 소설을 먼저 읽지 않았을까 싶다. 당대 가장 핫한 연기파 배우 톰 행크스, 오드리 토투, 이언 맥켈런까지 합세를 했지만, 소설에서의 열풍만큼은 아니었다. 보다 보면 역시 소설의 줄거리만 열심히 스크린에 갖다 옮겼다는 생각만 든다.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훌륭하고 인기 있는 원작일수록 영화화할 때 그냥 치기로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영화 <체실 비치에서>가 더욱 아쉬울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일부러 소설을 먼저 읽지 않았다. 소설에 홀딱 반해서 영화 보고 실망한 사례가 적잖아서 우선 영화에만 흠뻑 빠지고 싶었다. 그런데 이건 뭐냐 싶다. 인트로에서 뭔가 확 이야기로 끌어당길 것 같이 좋았다가 거기서 끝이다. 영화에서 말하는 메시지가 뭘까? 결혼 첫날, 행복함을 꿈꾸던 소심한 듯 하지만 뭔가가 어색한 사이. 분명 신뢰는 하지만 표현에 서투른 부부의 모습이 나온다. 신혼 첫날 섹스에 실패한 신혼부부. 신부인 플로렌스는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가고, 신랑 에드워드는 괴로워하다가 그 여자를 쫓아가고, 결국 미숙한 그 두 젊은 부부는 그날로 헤어지게 된다. 섹스 공포증이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플로렌스, 그런 심리적 압박이 형성된 이야기와 이미지를 교차 편집으로 계속 보여주고, 신랑인 역사학도이자 사상가 에드워드 역시 뭔가 소심하면서도 성격 급한 면을 숨겨진 이야기로 편집해서 보여준다. 1962년에서 시작한 영화는 훌쩍 뛰어넘어 1975년에 이르고, 플로렌스의 딸과 우연히 재회를 하게 된 에드워드. 그녀는 결국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중점을 좀 뒀으면 좋았을 텐데 갑자기 2007년으로 바뀌어 할머니가 된 플로렌스의 고별 공연에 에드워드가 객석에 앉아있다. 연인 시절 이야기했던 극장의 C열 9번에 앉아있는 것을 무대에서 연주하던 플로렌스가 보고 한줄기 눈물을 흘리고, 연주를 마치고 에드워드는 브라보를 외치며 눈물을 흘린다… -_-

그리고 엔딩 크레딧… 영화를 보던 나는 너무 황당해서 멍하니 있었다. (이후 부랴부랴 소설을 찾아서 읽어봤다. 소설을 읽어보고 더 화가 났다. 이렇게 섬세한 이야기를… 각본을 잘못한 건가, 감독이 형편없는 건가, 아니면 영화 내내 거슬렸던 여자 배우의 연기력 문제인가)

내가 갔던 VIP 시사회는 끝나고 영화의 음악 감독인 댄 존스와 플로렌스의 바이올린 스코어를 연주한 에스더 유가 직접 나와서 작은 연주회 및 관객과의 대화가 있던 자리였다. 음악회는 좋았다. 소리가 다 숨어 먹어 들어가서 악기 울림이 전달되지 않던 영화관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연주는 아주 훌륭했다. 영화잡지 기자가 나와서 나름 부연 설명을 해주니 그나마 아… 감독이 의도했던 게 이거… 였…나. 정도로 약간의 이해만.


시사회 이후 있었던 뮤직 톡


대놓고 이야기하겠다.

이 영화는 자체의 여백이 상당하다. 내용이 늘어지거나 질질 끄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는 여백이 존재한다. 아마 관객에게 생각하게끔 한 감독의 의도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것 아는가? 여백이 많은 영화는 두 가지 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바로 배우는 관객이 눈치채지 못하게 오버하지 않고 연기를 잘해야 하거나, 감독이 영화 여백의 프레이즈를 세련되고 부드럽게 편집을 해야 한다. 나는 영화가 끝나고 영화잡지사 기자의 설명을 듣고, 소설을 읽고 나서야 플로렌스가 얼마나 클래식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알게 됐다. 시얼샤 로넌이 어리고 훌륭한 배우라고 할지 모르지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부분에서 스트링 위에서 둥둥 떠있는 보잉이 너무 어색하고, 심지어는 왼손 비브라토가 전혀 되지 않아서 영화 내내 화면에서 교묘하게 그쪽을 안 보이게 편집했다. (실제 퀄텟 연기 씬 중 활싱크가 가장 어색한 배우는 시얼샤 로넌이었다. 소설에서는 음악을 연주할 땐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는 캐릭터인데 영화에서는 그저 까칠하게 성질내는 철없는 부잣집 딸 이상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 내용상 비브라토를 하는 손가락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니 몰입이 안되지. 음악가를 연기한다고 꼭 음악을 진짜 연주하라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극 중 연주해야 하는 부분을 실제로 연주는 못하더라도 연주자의 호흡을 몸에 익혀야 한다. 그래야 그 배우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관객도 공감할 수 있다. 연기를 기계처럼 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맡은 배역을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습득하고, 연기에 색깔을 입히는 게 우선이 아니었을까 싶다. 심지어는 어처구니 없는 마지막 연주 씬에서 조차 호흡이 맞지 않아 음악이 둥둥 떠다닌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 배우는 '연기'를 하고 있네! 란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진짜 연기를 잘했다면 나같은 막눈에 바이올린 보잉이 먼저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다.) 전체적 연기에 무게감이 없다보니 영화에서 그녀가 퀄텟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외침이 가볍고 공허한 울림으로 밖에 전달되지 않았다.

원래 영국이나 아일랜드에서는 좀 어색해도 괜찮아! 라면 할 말 없지만, 요즘 우리나라 배우들 봐라. 영화 속 직업은 마치 태생부터 그 직업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기를 한다. 자연스러운 감정 연기를 위해 기본적인 스킬은 무서울 정도로 연습을 하는 이유다. (현재 그런 노력파에 대표적인 배우가 박정민이다) 그래도 영국 스타일의 영화는 원래 그렇다고 한다면 참 불친절한걸까!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클래식 곡들이 많이 등장한다. 연주 자체도 훌륭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화면 내에서 그것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것이 아니라 뭔지 모르게 섞이지 않은 재료를 보는 것 같았다. 만약 감독이 의도한 바가 여백이 많은 연극처럼 연출할 영화였다면, 아예 대놓고 연극 느낌 나는 <도그빌>이나 <어둠 속의 댄서> 정도로 만들든지… (쓰고 보니 모두 라스트 폰 트리에 감독 작품이네. 이 감독도 썩 내 취향은 아니다) 체실 비치라는 연극 무대 같은 곳에서 두 배우의 감정이 조심스럽다가도 격정으로 치닫게 주고 받다가 헤어진다. 그런데 가장 황당한 씬은 영화의 마지막이다. 이건 뭐 시니컬한 영국 영화에서 갑자기 할리우드의 <이프 온리> 같은 연출로 확 바뀌어서 게다가 분장까지 어색하고, 우는 장면에서 ‘어… 이거 왜 이래?’ 싶었다. 영화인데 왜 마지막을 이렇게 억지로 마무리하려고 했을까? 소설의 여백과 영화의 여백은 분명 차이가 있는데 말이다. 플로렌스의 소식을 듣고 좀 긴 여운으로 남겼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 대놓고  C열 9번 좌석에서 짠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극장 밖을 나가는 에드워드를 플로렌스가 본다든가 뭐 이런 식으로 이 영화가 추구하는 여백을 여기서야 남기지. 여백 투성이었다가 갑자기 마침표 딱 찍고 마무리를 하니 허허~하고 공허한 웃음만 나오더라.


여배우님 바이올리니스트 역할이었으면 보잉 연습부터 했어야죠.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에스더 유의 음악이 아까웠다.




원작은 짧지만 치밀하고 좋은 소설이다. 읽은 내내 내가 플로렌스도 되고, 에드워드도 된다. 그 시대의 상황도 이해가 되고,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매 장이 넘어갈 때마다 그곳에 함께 있는 기분이다. 훌륭한 원작, 훌륭한 음악 감독, 훌륭한 아티스트 에스더 유… 최고의 재료로 멋진 요리를 만들 수 있었는데, 겉으로는 멀쩡한데 가장 중요한 요리의 간이 맞지 않은 상황과 비슷하다. 여백이 아닌 중심의 부재로 느껴진 아쉬움이 짙게 남은 영화다.



그리고 동일한 소설에서 하는 이야기와 영화에서 하는 이야기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영화감독들이나 원작자, 각본가들이 이 부분을 착각하지 말길 바란다. 여백의 결이 분명히 다른데 영화라는 틀에 구겨 넣으면 소설의 독자들이 펼쳤던 많은 상상력은 퇴색되고 만다. 여백을 남기더라도 영리하게, 배우는 감정 연기 이전에 그 배역에서 무엇이 가장 핵심적인지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

<체실 비치에서> 소설은 추천한다. 영화는 글쎄다.

어쩜 영화 보고 '이게 뭔가?' 싶어서 소설 찾아보게 만든 작가 이언 매큐언의 진짜 영리한 한 수에 내가 넘어간 것일 수도…


p.s. 자기 옷을 못찾아 입은 배우들과 연출의 부재. 같은 이언 매큐언 원작이라도 어톤먼트와 비교하지 말기를… 어톤먼트에서는 키이라 나이틀리와 제임스 맥어보이가 소설의 여백을 충실히 채워줬다.


*글 : 취미발레 윤여사 / 윤지영 작가

*사진 출처 : Daum영화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로 시사회 관람 후 올린 글입니다.



취미발레 윤여사 / 윤지영 작가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yoonballet_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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