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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_동요가 없는 영화

너의 인생에 꾸역꾸역 밀려온 그 커다란 동요가 너무 다행이야


#15_영주

너의 인생에 꾸역꾸역 밀려온 그 커다란 동요가 너무 다행이야



브런치 무비 패스 작가로 선정이 되고 가장 좋은 점은 시사회에 초대를 받아서 영화를 본다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그저 공짜로 영화를 보는 장점 이상의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전혀 예상치 않은 내용의 영화를 무작위로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때로는 내 취향에 맞지 않을 때도 있기도 하고, 의외의 감동에 오랫동안 영화관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주>는 동요가 없는 영화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영주는 막 스무 살이 되었지만 여느 발랄한 스무 살 아가씨와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5년 전 영주가 중학생 때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죽고, 남동생과 고아로 버티며 살아왔다. 미래도 희망도 경제적 여유도 없이 그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부모님과 살던 재개발 지구에 놓여있는 작은 빌라 한 채뿐이다. 일가친척은 고모 내외뿐, 고모도 삶에 지쳐서 이들을 돌볼 여유가 없다. 그러던 중에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생이 집단 폭력 사건의 가해자 중 하나가 되며 피해자와의 합의금 300만 원을 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300만 원을 구하기 위해 영주는 이미 등 돌린 고모에게 부탁을 하지만 외면을 당하고, 신용대출을 하려다 엄청난 수수료만 사기를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아이고… 하며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은행 잔고는 10여 만원, 그 날은 영주 부모님의 제삿날이다. (비통함에 어쩔 줄 몰라하다 제사상에 올릴 커다란 댓 병 청주를 병째 마시는 장면에서 나도 함께 대작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더 이상 돌파구가 없는 영주가 우연히 보게 된 것은 5년 전 부모님의 사건 판결문. 거기서 교통사고의 가해자를 찾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서 그 집을 찾아간다. 그런데 여기서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 영주는 그들이 일하는 두부가게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취직을 하게 되고, 오히려 자기 부모를 죽인 거나 다름없는 그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연다. 심지어는 그들 부부를 좋아하게 된다. 교통사고 가해자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다. 졸음운전으로 인한 사고였고, 그들 역시 가해자가 되었기에 평생 빚지는 마음으로 삶에 용서를 구하며 사는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들 역시 영주를 친 딸처럼 여기며 아껴준다. 영주가 그때 그 교통사고 피해자의 딸이라는 것을 모르는 채로…



상당히 잘 만든 영화다. 이 긴 호흡을 끌어가는 배우 김향기의 연기가 독보적이고, 절대 감정을 오버하거나 연기하고 있다는 과잉 행동도 없이 그저 잔잔하다. 김호정, 유재명의 연기도 영화는 배경음악도 거의 없이 그냥 조용히 흘러간다. 영화의 전체 샷을 보여 주는 동네 화면에서도 핀도 살짝 나가 보이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정밀하거나 세심함도 없다. 대화보다는 여백이 훨씬 많은 영화이다.

영주의 말보다는 말하지 않는 상태의 대사가 더욱 긴 여운을 남긴다. 화면의 흐름도 정지 상태, 스무 살의 발랄함도 없이 찌는듯한 여름의 날씨도 정지 상태, 부모가 돌아가신 이후 영주의 마음의 문도 정지상태다. 그 고요함과 적막함이 영화 내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고, 상황이 답답하긴 해도 가느다랗고 미세한 긴장으로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렇게 계속 동요 없이 흘러가다가 비로소 영주의 미소가 나온다. 가해자 부부에게 마음의 빗장을 여는 순간. 찬란한 햇빛도 아니고, 천지개벽할 것 같은 감정의 동요도 없다. 그저 잔잔한 수면 위에 미세한 파동이 밀려오는 것처럼 감정이 흘러간다. 미소 지으면서도 영주는 힘들어한다. 이 사람들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자기 부모에게 죄를 짓는 기분도 들고, 동시에 세상 누구도 의지할 수 없다가 가해자 상문(유재명)의 아내 향숙(김호정)의 다정함에 엄마에게 기대고 싶은 아이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맘껏 좋아하지 못하면서 머뭇거리지만, 이내 영주의 마음의 색은 점점 더 밝아진다. 그걸 바라보는 관객 입장에서는 안타까움과 깊은 감정 이입에 그냥 눈물이 흐른다. 복받쳐 오르는 눈물이 아닌 아프고 힘든 눈물이다.

영화 막바지에 영주가 괴로워하며 극단적인 선택의 기로에서 쏟아내는 통곡 장면에서 나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장면에서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아… 저 친구가 드디어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구나. 잔잔한 수면의 동요를 내면 깊숙이 느꼈구나.' 그래서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터덜터덜 걸어가는 영주의 뒷모습이 페이드 아웃될 때 나는 스스로 긍정적 사고로 영화를 바라봤다.

‘잘됐다. 다행이다. 영주야… 너의 인생에 꾸역꾸역 밀려온 그 커다란 동요가 너무 다행이야…'


드디어 미소를 보이는 영주. 그 미소에 다행스러우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출처 : Daum  영화)



스무 살은 어떤가?

영화 초반 고모가 영주를 훈계하자 영주가 고모에게 반항하듯 말한다. “어린애 아닌데…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이 말 한마디에 고모는 화가 나고 남매에게 마음을 닫아 버린다. 영주는 스무 살이 되면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 나이는 모든 것을 해나가기에 여전히 미숙한 나이다. 어린애가 아니라고 하지만 영주와 동생 영인이의 행동은 위태로울 정도로 미숙하다. 세상에 완전하게 던지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 분명 어린이는 아니지만,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진짜 어른이 보이지 않게 정신적 지주를 해줘야 할 것이다. 동생 영인에게 “누나만 믿어.”라고 말은 해도 혼자 있을 땐 어쩔 줄 몰라하는 영주의 모습에 정말 마음이 아팠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야 하는 나이에 웃는 것조차도 표현할 줄 모르는 영주. 영화 보는 내내 어깨를 툭툭 쳐주면서 괜찮아!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스무 살은 두 번 살고도 6년을 더 살았다. 이젠 스무 살의 미성숙함을 두려워할 나이가 아니라 오히려 진짜 어른으로서 내 주변을 다독일 나이가 된 것이다.




김향기. 엄청난 배우가 될 것이다.

아역 때 귀여운 마스크였고, 실제로도 영화 속 나이와 같은 스무 살이 된 배우다. 지금도 보통 때는 귀여운 인상인데 영화에서 정말 연기를 잘한다. 캐릭터를 정확히 알고 있고, 말로 하는 대사가 아닌 몸짓과 표정과 호흡으로도 대사를 할 수 있는 대단한 배우다.
요즘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를 직접, 간접적으로 접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 우리는 대중 매체에 나오는 많은 연예인이나 배우, 아티스트 들의 외형적인 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건 진짜 극히 일부분이라는 것. 피지컬(phisical)의 요소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aura, 에너지)다. 어떤 아우라를 어떻게 발산할 것인지 따라서 어마 무시한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앞으로도 ‘김향기’라는 배우를 아주 주의 깊게 지켜볼 예정이다.


마음이 아프면서도 너무 예뻤던 장면 (출처 : Daum  영화)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by Chalie Chaplin)

결코 가벼운 마음과 모로 누워서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살아내고 있는 삶의 무게와 궤적을 더듬고 싶다면, 그리고 답답한 그 상황 속에서도 뭔가의 희망이라는 꼬투리를 잡고 싶다고 이 영화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투박해도 순수하고 예쁜 영주와 영인이가 있고, 그들을 보면서 내가 진정 어떤 어른으로 살아갈 것인가도 고민을 하게 됐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누구나 힘든 비극적인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이쯤에선 조금 멀리 바라보자. 코미디까지는 아니어도 누구나 인생은 살만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영주의 걸어가는 뒷모습의 어깨에 손을 얹고 ‘괜찮아. 잘했어.’라고 다독거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내 주변과 나 자신에게 힘을 실어주고픈 그런 밤이다.



영화 <영주> 공식 포스터 (출처 : Daum 영화)


*글 : 취미발레 윤여사 윤지영

*사진 출처 : Daum영화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로 시사회 관람 후 올린 글입니다.



취미발레 윤여사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yoonballet_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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