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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로 간 아이들_상처와 치유의 모노로그

결론이 아닌 현재 진행형인 사랑



#14_폴란드로 간 아이들

상처와 치유의 모노로그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과정은 정말 오묘하다. 내 안에 세포 하나로 자리 잡은 생명체가 조금씩 커가며 나의 양분을 공유하며 신기함과 놀라움을 제공하며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한다. 엄청난 고통을 동반한 출산 과정 끝에 아이는 경이로움으로 세상을 향해 인사한다. 기쁨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이 과정은 육아하는 내내 지속된다. 그래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것은 두려움과 고통보다는 아이가 주는 기쁨과 희망이 있기에 견딜 만하다.




배우 추상미가 감독으로 5년 만에 돌아왔다. 영화 초반에 그녀가 겪은 어려움의 시간을 짤막한 내레이션으로 말한다. 유산과 늦은 출산, 어렵게 얻은 아이. 아이를 잃을까 봐 두려움을 떨면서 계속된 악몽. 그리고 이어지는 산후우울증.

뭐 옛날 사람들이 들으면 ‘애 하나 낳으면서 엄살을 떨긴…’ 할지 모르지만 이건 하나를 낳던 여럿을 낳던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나와 동갑인 그녀의 독백 중 일부분은 나와 비슷한 상황도 일부 있어서 공감이 갔다. 나 역시 늦은 나이에 큰 아이를 임신했을 때 기쁨과 두려움이 동전의 양면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피부 아래 혈관마저 투명해 보이는 갓난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을 때 숨을 쉬는지 두려워하며 손가락을 코 밑에 대본 경험. 처음 엄마가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행동이다. 현재 세 아이가 모두 건강하게 잘 성장함에도 불구하고, 멀쩡히 등교한 아이 학교에서 전화가 오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기도 한다. 내 안에서 나온 또 하나의 생명체. 그렇게 오롯이 온전한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란 존재는 항상 아이를 바라보게 된다.



영화에서는 두 가지 평행적인 이별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는 6.25 한국전쟁 이후 북한은 인민군이 주둔했던 곳에서 발생한 수많은 전쟁고아를 자신들의 동맹국인 러시아, 동유럽 쪽으로 분산해서 보낸다. 1,500명의 아이들이 폴란드로 보내진다. 처음 영화를 보기 전에는 단순히 입양을 보내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보다 우리가 아예 알지 못하는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단순히 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낸다기보다는 전쟁이 치러질 동안 고아들을 돌봐달라는 정치적 약속 같은 개념이었다. 여기에서 반전은 아이들이 보내진 수용소가 우리가 생각하는 끔찍한 수용소가 아닌 전쟁으로 영혼이 피폐해진 아이들에게는 안식처와 같은 곳이었다. 자연을 벗 삼아 뛰어놀고, 생김새도 완전 다른 폴란드 선생님들은 북한 전쟁고아를 자신의 자식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양육하고 키웠다는 것이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아이들은 전쟁의 아픔도 잊고 폴란드에서 치유의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종전 후 북한에서는 경제 개발 운동의 일환인 천리마 운동이 전개되면서 각 나라에 보내졌던 모든 전쟁고아(몇 년의 시간이 지났으니 대부분 10대 후반의 청소년이 된 셈이다)들을 노동력 동원 차원으로 전원 본국으로 송환한다. 송환의 과정을 겪으면서 떠나는 아이들과 남아있는 선생님 모두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겨준다. 정치적으로 힘을 쓸 수 없는 선생님들. 마음으로는 아이들과 영원히 있고 싶지만, 그렇지 못했던 현실에서의 자괴감에 90세 가까이 된 선생님들도 그때의 이야기에 계속 눈물을 흘린다. 엄마, 아빠라 부르던 생김새도 다른 그 아이들을 그 이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탈북자에 대한 조명이다. 새터민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목숨을 걸고, 중국 국경을 통해서 남한인 대한민국으로 왔다. 영화에서는 배우 지망생인 나이 어린 탈북자의 삶을 조명한다. 학원과 입시를 전전긍긍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학생들과는 달리 그들은 한 끼니를 해결하지 못해서 음식을 구걸하는 꽃제비로 살았고, 탈북 과정에서 가족이 죽어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본 아이들이다. 그렇게 죽음을 넘어서 남한에 왔지만, 이곳에서의 생활도 녹록지 않다. 새터민에 대한 편견과 굳이 편견을 갖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 한국의 정서에 선뜻 들어오지 못하고, 계속 아웃사이더로 맴돌기만 한다.

영화는 우리가 몰랐던 역사를 하나씩 이야기 한다. (출처: Daum 영화)



엄마를 여의고 동생과 아버지를 놔둔 채 혼자 남한에 내려온 20대 초반의 송이는 추상미 감독과 폴란드로 보내졌던 아이들의 발자취를 하나하나씩 따라간다. 영화는 그들의 여정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았다. 분명히 60여 년이 지난 지워져 가는 과거를 쫓아가서 이야기를 찾아 나서지만, 단순히 과거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팩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는 진심에 관한 진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았다. 극적인 결말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들이 이런 것을 찾았고, 그 가운데서 놀라운 사실들이 간간이 튀어나오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그것 마저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를 찍는 과정에는 관람하는 과정에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 (출처: Daum 영화)



모성애를 이야기하는 것인가. 

전쟁의 아픔을 논하는 것인가. 

남은 자들의 상처를 조명하는 것인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에 사랑을 쏟음에 대한 감사인가.



영화는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결론짓지 않는다. 6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기차도 없이 숲 속에 남겨진 선로의 흔적처럼 희미하게 연결 짓는 매듭 없는 구슬꿰기처럼 시간 속의 이야기를 나열한다. 그 가운데 어떤 구슬을 바라보며 치유를 할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아마 추상미 감독은 영화를 만들면서 자기를 돌아보고 주변을 포용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 같고,

송이는 이전보다 조금 더 자신을 표현하며 자신이 경험한 상처를 객관화하는 일에 조금 익숙해졌을 것 같다.

관객으로서 영화를 본 나는 며칠이 지난 현재 더욱 강한 여운으로 내 인생의 현재 진행형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됐다.

결론을 향해 달려가기보다 현재에 있는 나를 지켜보며 내 주위를 돌아보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임을 알게 됐다.



전쟁의 참혹함과 비참함이 인간이 인간을 향한 사랑의 기운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진심은 오랫동안 기억된다. 어떤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는가. 잠깐이더라도 순간에 충실하며 진심을 전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 할 도리다.

(출처: Daum 영화)



*글 : 취미발레 윤여사 윤지영

*사진 출처 : Daum영화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로 시사회 관람 후 올린 글입니다.



취미발레 윤여사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yoonballet_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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