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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북_용기 있는 한 걸음

진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면 용기가 필요한 거야


#16_그린 북

 진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면 용기가 필요한 거야



시사회를 보러 갈 때 제목만 보고, 포스터만 보고 간다. 사전에 어떤 내용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영화를 대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영화 보는 내내 ‘도대체 저 능글맞으면서도 사랑스러운 중년 배우는 누구일까?’란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인데 내가 아는 배우인가, 아닌가를 몇 번이나 생각해도 모르겠더라. 그러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도 모르게 작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어머! 저 배우 비고 모르텐슨(Viggo Mortensen)이었어???”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가장 외로우면서도 의로운 영웅이고, 멋있는 남자 중의 남자. 쓸쓸한 아웃사이더지만 마음이 따뜻한 강인한 1편의 아라곤, 황량한 대규모 전투에서 용맹함과 의리로 똘똘 뭉친 2편의 아라곤, 이윽고 모든 어려움을 넘어서서 진정한 왕의 귀환으로 돌아오는 3편의 아라곤. 왕의 귀환에 나오는 대관식 장면에서는 그 기나긴 여정의 마침표라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로 전 세계 영화팬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받았던 배우. 비고 모르텐슨 이전에 극 중 아라곤이라는 캐릭터가 워낙 강렬했기에 인상에 남는가 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반지의 제왕 이후 비고 모르텐슨의 행보를 지켜보니 캐릭터가 배우를 만든 것이 아니라 비고 모르텐슨이라는 배우 자체가 영화 속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영화 <그린 북>을 보면서도 누군지도 못 알아볼 정도로 체형 자체가 달라진 배우. 그러나 그의 연기는 충분히 극 중 토니 발레롱가(별명 토니 립, 떠벌이 토니)를 우리 눈 앞에 그대로 재현시켰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62년 미국, 허세와 주먹으로 똘똘 뭉친 이탈리아 출신인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르텐슨)는 일하던 클럽이 임시 휴업을 하면서 임시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이때 교양이 넘치고 박식한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박사의 운전기사 면접을 보게 된다. 그러나 토니는 유색인종(흑인)을 아주 경멸하는 인종주의자다. 셜리 박사는 흑인 피아니스트다. 흑인이지만 흑인 특유의 재즈 스타일이 아닌 정통 클래식을 공부한 사람이다. 그러나 흑인이 클래식 연주자로 활동하기에 클래식 세계의 벽은 높았다. 그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동하지만 상당히 백인 같은 사운드를 내는 피아니스트다. 백악관에도 초청되는 등 미국 전역에서 콘서트 요청을 받으며 명성을 떨치고 있는 돈 셜리는 위험하기로 소문난 미국 남부 투어 공연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투어 기간 동안 자신의 보디가드 겸 운전기사로 토니를 고용한다. 거친 인생을 살아온 토니 발레롱가와 교양과 기품을 지키며 살아온 돈 셜리 박사. 유난히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의 남부 지역으로 투어를 결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영화를 보면서 그 궁금증이 하나씩 풀리게 된다.

벗어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흑인 보스를 둔 직장으로 구하게 된다. (출처 : Daum 영화)


영화 제목인 ‘그린 북’이 뜻하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여행 가이드북이다. 나 홀로 떠나는 독립 여행으로 가장 유명하게 알려진 여행 가이드북은 ‘론리플래닛’이 아닐까 싶다. 론리플래닛이 혼자 떠나도 기대와 즐거운 정보가 가득한 가이드북이라면 ‘그린 북’은 경계와 구분을 뜻하는 가이드북이다. ‘그린 북’은 당시 미국에 실제로 존재한 흑인만을 위한 여행 안내서이다. 흑인들은 백인과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도 화장실을 이용할 수도 없다. 당연히 호텔도 흑인들만 사용하는 호텔이 있고, 심지어 어느 지역에서는 통행금지처럼 야간에는 흑인이 다니는 것도 단속의 대상이 됐다. 돈 셜리의 음반회사에서는 남부 투어를 떠나기 직전 운전기사인 토니 발레롱가에게 그린 북을 건네준다.

영화 속 돈 셜리는 특별한 흑인이다. 그는 부자이고 똑똑하며 음악에 있어서는 천재다. 아무리 그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 하더라도 피부색 하나 때문에 그는 차별을 받는다. 그의 트리오 멤버(첼로, 콘트라베이스)가 백인이어서 백인 식당에서 밥을 먹어도 막상 공연의 주인공인 돈 셜리는 그 자리에서 식사를 하지 못한다. 공연 관계자들도 무대 오르기 직전에는 웃으며 정중하게 그를 대하지만, 막상 그가 건물 안 화장실을 가려고 하면 여전히 정중하고 웃는 표정으로 밖에 나가서 축사 같이 생긴 뒷간에서 볼 일을 보라고  한다. 그냥 그 시대의 백인들에게 유색인종은 그런 존재였다. 무시하려고 하는 무시가 아니라 너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니 우리의 영역에 들어오지 말아라 라는 분명한 경계의 의미다.

영화를 보다 보면 콘서트에서 돈 셜리가 연주를 할 땐 음악에 몰두하는 표정이지만, 연주를 마치고 객석을 향해서 웃을 땐 정말 환한 인위적인 미소를 띤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칭송을 해도 흑인이라서 미워서 무시하는 것이 아닌 ‘너와 우리는 다른 존재야.’ 그러니 이 원 안으로는 들어오지 마…

연주 후 자신의 번민을 숨긴 돈 셜리 특유의 미소 (출처 : Daum 영화)

콘서트를 따라다니면서 토니(비고 모르텐슨)는 이런 부조리에 점점 분노를 느낀다. 인종차별주의자였던 그가 서서히 변하면서 도저히 이런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셜리 박사가 부당한 대우를 당할 때마다 감정 위주의 토니는 자주 폭발하고, 주위에 주먹을 휘두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셜리 박사가 이야기한다. "폭력은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없고, 이룰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존엄함이다"

계속 벌어지는 사건 속에서 토니는 사회의 확연한 경계를 인식하게 된다. 여행 중 토니와 셜리 박사는 서로를 조금씩 알게 된다. 당시 상황이라면 백인 보스에 흑인 운전사의 그림이 훨씬 자연스러운 시대였지만(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를 떠올려보자) 여기는 반대다. 흑인 보스에 백인 운전사. 사람들은 그 흑인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고, 운전사인 토니를 찌질한 못난이로 취급한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의 관념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영화 <그린 북>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실제 피아니스트 돈 셜리는 존재했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천재라고 명할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8개 국어를 하고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웬만한 사람들이 이루기 어려운 업적을 이뤄낸 사람이다. 이렇게 대단한 재능을 갖고 있어도 그는 자신의 재능보다 인정받지 못했다.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당한 거다. 흑인 사회에서는 너무나 이질적인 존재라서 함께 할 수 없었고, 백인 사회에서는 당연히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펼칠 수 있는 꿈과 재능이 엄청난 사이즈임에도 불구하고 손바닥만 한 그린북에 갇혀있는 것이다. 그는 이런 차별을 알면서도 왜 굳이 차별이 더 심한 남부 지역의 투어를 떠난 것일까? 8주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토니도 그의 운전기사 겸 매니저의 일로 고용이 되었지만 이 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기어이 트리오 멤버들에게 물어본다. 트리오 멤버들은 처음에 대답을 안 하다가 나중에야 이런 이야기를 한다.

“왜 고생스럽고 위험하게 남부 투어를 하냐고 물어봤지? 어떻게 이런 차별을 참을 수 있냐고 했지? 천재가 가지고 있는 재능만으로는 부족해. 진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면 용기가 필요한 거야. 그래서 셜리 박사는 그것을 선택한 거고.”

영화를 보면서 안타까운 점도 많지만 웃는 타이밍도 많고 유쾌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주 많다. 그래도 내 마음에 가장 깊게 와 닿은 대사는 바로 저거였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바꾸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계속 당연하게 여겨지는 거다. 용기 있는 자가 물에 한 걸음을 딛고 들어서야 잔잔한 파장이 일어나면서 변화가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돈 셜리는 진정 용기 있는 천재인 것이다. 외롭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지만, 그의 노력에 주변의 사람들이 보는 시선은 달라진다. 그리고 토니와 셜리 박사는 서서히 서로를 닮아가는 친구가 되어간다.

진정한 친구는 일방적이지 않고 조금씩 서로를 향해 가는거다 (출처 : Daum 영화)

실제로 상당히 똑똑한 재주가 많은 배우인 비고 모르텐슨은 정말 무식하고 허풍쟁이 연기를 어쩜 저렇게 할까 싶었다. 불룩 나온 배에 러닝셔츠와 트렁크 팬티만 입은 모습은 왜 그렇게 잘 어울리는지. 끊임없이 음식을 먹고, 말 많고, 허세 가득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가족을 사랑하고, 주변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안다.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지만 상남자여도 정이 가득한 사람이다. 스크린에서 비고 모르텐슨은 존재감이 상당한 배우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돈 셜리 역의 마허샬라 알리의 연기도 정말 출중했다. 둘의 주고받는 케미도 좋았다.



영화 보기 전에 130분 러닝타임이 너무 길지 않을지 살짝 걱정됐는데, 그런 걱정은 내려놔도 좋다. 더군다나 2019년 1월 개봉이라고 하는데, 새해에 볼 첫 영화로 강력 추천한다. 영화만이 줄 수 있는 재미와 감동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

이 영화가 좋았던 점은 아주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영화 내내 유쾌한 위트로 풀어가는 점이었다. 또한 셜리 박사의 용기가 위험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행해 온 작은 용기들이 모여서 현재 많은 것이 변화됐다. 이성의 셜리 박사와 위트와 욱한 성질의 토니. 그들의 정반대의 조합은 묘하게 어우러진다.

어차피 인생은 희극과 비극이 적당히 버무려진 돌솥비빔밥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뜨겁지만 적당히 불어가며 달래가며 좋은 것을 선택하고 결국에 맛있게 먹으면 되는 거다.

돌솥이 뜨겁다고 걱정은 하지 말자.

용기 있게 숟가락을 든 자가 맛있게 먹을 것이다.

 

실제로 존재했던 그린 북 (출처 : Daum 영화)



*글 : 취미발레 윤여사 윤지영

*사진 출처 : Daum영화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로 시사회 관람 후 올린 글입니다.



취미발레 윤여사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yoonballet_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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