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더 이상 내가 아니다. 과거와 같은 난 없다.
23살의 체 게바라는 친구와 여행을 떠난다. 글로만 읽던 미지의 대륙을 몸소 겪고 싶었다는 단순한 목적이었다. 여행은 오래된 스쿠터를 덜덜 거리며 타며 신나게 시작된다. 그런데 어쩐지 가벼운 마음으로 떠난 것과 달리, 가는 곳마다 찐한 향을 풍기는 삶의 현장이 펼쳐진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새로운 삶을 찾아 광산으로 향하는 부부, 침략된 고대도시에 있는 인디오들, 그리고 나병환자촌에 모인 사람들을 만난다. 그 과정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한다. 약 8개월 간의 여정이 끝난 후, 그는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느낀다.
2012년 여름, 나는 스페인으로 떠났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걸었다는 순례자의 길을 걷기 위해서였다. 35일 동안 약 840km 정도를 걸었다. 그 당시 내가 매일 했던 일은 무거운 배낭을 메고 A에서 B로, 그저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걷는 것뿐이었다. 그 외 특별한 활동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그 여행은 어땠냐고 물어보면, 내 대답은 언제나 똑같다. 인생의 가치관을 바꾼 길을 걷고 왔다고.
카미노 데 산티아고에는 '알베르게'라고 불리는 순례자 전용 숙소가 있다. 보통 20-30km에 1개씩 위치해 있는 게스트하우스 같은 곳이다. 늦은 시간에 도착하게 되면, 침대가 없어서 땅바닥에 오래된 침낭이나 매트리스를 깔고 자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카미노를 걷기 시작했을 때, 며칠은 하루에 20km를 걷는 것도 어려웠다. 험한 산길인지라 조금만 걸어도 발목과 무릎이 욱신거렸다. 걷는 내내 침대에 누워 편히 쉬고픈 마음만 가득했다. 알베르게의 땅바닥에서 자는 건 정말 원치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새벽부터 바삐 준비해서 나가 걸음을 재촉하게 되었다.
다섯째 날 때쯤 되었을까, 숙소에서 만난 스페인 여자 아이가 말을 걸었다. 그녀는 오늘 날씨가 참 좋아서 하늘도 아름답고, 오는 길에 보이던 꽃길도 참 이뻤다고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당황스러웠다. 그 아이가 말한 하늘과 길을 나는 보지 못했다.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가던 내가 기억하는 것은 울퉁불퉁한 땅바닥뿐이었다. 순간, 카미노는 빨리 걷기 경쟁 대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후 나는 숙소에 도착하는 마지막 순례자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무 그늘 아래서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쉬기도 하고, 풀밭에 누워 파란 하늘을 보기도 하고, 카페에서 커피 향을 즐기며 여유를 만끽하고, 냇가에 앉아 흐르는 물에 손발을 담그고 놀았다.
어느 순간,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구보다 빨리 도착하는 사람보단, 누구보다 많은 것을 느끼며 목표를 향하는 것이 좋았다. 삶을 이렇게 살아보자고 마음먹었다.
카미노를 걷다가 발목을 삐끗했던 적이 있었다. 시큼해져 오는 발목 때문에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그늘을 찾아 잠시 앉아 아픈 발목을 주무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순례자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걸어왔다. "Are you Okay?" 그는 물음과 동시에 아무렇지도 않게 내 발을 두 손으로 잡곤 주물렀다. 땀이 나서 발이 축축한 상태였다. 낯선 사람의 호의에 어찌할 줄 몰랐다. 반대로 상대방은 그런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몇 번 더 발목을 주물러 주더니, 옆에 앉아 물을 홀짝이다가 이내 떠나버렸다.
이후에도 길에서 만난 낯선 이들의 호의는 계속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마을에서 마주친 타지인인 내게 "올라"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지금 나한테 인사를 한 게 맞나? 뒤에 누가 있는 건가? 처음엔 그 인사가 적응이 안 돼서, 정확히 확인해보려고 몇 번씩이나 뒤돌아봤었다. 몇몇 현지인은 지나가는 내게 물과 빵을 건네주기도 했다. 아예 탁자를 집 밖에 꺼내놓고, 순례자들에게 가져가라고 음식을 한 보따리 내놓는 사람도 있긴 했었다. 그 길 위에 사람들은 정말 이상했다. 그들은 다른 이의 평온을, 행복을, 건강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사람이 보이면, 내가 먼저 반갑게 "올라!"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길에 앉아 쉬는 순례자에게는 초코바와 음료를 건네주기도 하고, 알베르게에 일찍 도착한 날이면 먹을 음식을 푸짐하게 해서 뒤에 오는 순례자들과 나눠 먹기도 했다. 숙소에서 만난 관절이 아픈 이탈리아의 노부부에게는 한국에서 가져온 파스를 자랑스레 붙여 주기도 했다.
그 여행은 말 그대로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천천히 가도 된다는 여유로움, 사람과 함께 하는 것에 대한 믿음, 그리고 삶에 대한 무한한 다정함을 알려준 여행이었으니까. 약 35일간의 여정이 끝난 후,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의 주인공들처럼 나는 내가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길을 걸어보고 싶다. 그때가 온다면, 걸을 수 있는 가장 느린 걸음으로 길을 걸을 거다. 낯선 이의 아픈 발을 주물러 주며, 눈에 닿는 모든 것을 사랑하며, 달라진 나를 느끼며 그렇게 걷고 싶다.
[ 인생은 오마쥬 ]
영화 속 한 장면이 뜻하지 않게 내 인생에서 리플레이될 때가 있다.
*'인생은 오마쥬'는 매주 금요일에 한 편씩 업로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