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마흔넷이야. 못 할 일도 있고, 못 가질 것들도 있는 나이
영업팀 K씨를 회사 카페에서 마주쳤다. 취미가 프리다이빙이라고 했던가, 매년 발리로 서핑을 하러 간다고 했던 것도 같고. 카운터 앞에서 커피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 가만히 있는데도 온몸으로 "나는 건강하다"를 외치고 있는 듯했다. 매일 아침, 검은색의 매끈한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하는 20대 후반의 여성. 그녀는 어디서나 눈에 띄는 사람이다. 서구적인 외모, 위트 있는 말투와 호탕한 웃음소리까지. 그녀가 들어온 이후 사람들 사이에는 익사이팅 스포츠 열풍이 불었었다. 너도나도 헬스를 등록하고, 40대 미혼남 L과장은 자기도 할 수 있다며 호기롭게 클라이밍까지 등록했었다. L과장이 지난 건강검진에서 노화된 관절염 소식을 듣곤, 당근 마켓에 회원권을 반값에 내놓았다는 웃픈 소식은 한동안 핫한 술자리 안주거리였다.
나는 잠잠하던 불면증이 다시 도져서 고생 중이었다. 아니 그냥 나이가 들어서 아침잠이 없어지는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어김없이 새벽 4시만 되면 눈이 말똥말똥 떠지곤 했다. 잠이 오기만을 기다리다 결국 모자를 푹 눌러쓰고 집 앞 공원에 나가곤 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새벽 공원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꽤 있다. 그들도 나처럼 잠들지 못한 걸까? 그 시간, 숨을 헐떡이며 공원 트랙을 돌고 있는 사람을 구경하자면 묘한 동질감이 든다.
가끔 인스타그램에 새벽녘 공원의 풍경을 업로드했는데, K씨가 회사 사람들의 인스타 계정을 타고 타고 그 사진까지 봤었나 보다. "아침에 러닝 하시나 봐요?" 그녀가 활기차게 물었다. 3년간의 회사 생활에서 K씨와 얘기를 한 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관련 부서도 아닐뿐더러, 사무실도 달라서 얘기할 거리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네, 그냥 일찍 눈이 떠져서요." 멋쩍게 웃으며 대답하자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곤 "멋져요! 수고하세요"란 말과 함께 사라졌다. 사실은 러닝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어쩌면 몸부림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SNS에는 그저 새벽 감성에 혹해서 업로드했던 것도 있었다. 그러나 K씨의 물음에 선뜻 아니라고 말하진 않았다. 약간의 거짓을 보태, 나도 새벽부터 운동하는 멋진 여성이라고, 뽐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며칠 뒤 그녀가 카페에서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있는 게 들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만반잘부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양 옆에 앉아있던 직원들은 꺄르르 웃으며 "네, 저희도요!"를 외쳤다. 순간 그 단어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때 마침 카페에 있던 L과장이 뭐라고 한 거냐며 되물었다. "만나서 반갑고, 잘 부탁드린다는 뜻의 줄임말입니다. 만.반.잘.부" K씨는 익살스럽게 설명했다. L과장은 눈이 마주친 내게 대뜸 저 말을 알고 있었냐며 물었다. “그럼요.”라고 아는 척 웃으며 말했는데, 속으론 뜨끔했다. 퇴근길, 네이버 검색창에 소심하게 "신조어"를 쳤다. 쭉 읽다가 갑자기 이게 뭔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 핸드폰 화면을 꺼버렸다.
오랜만에 있는 사적 모임 회식에는 K씨도 오기로 되어있었다. 저녁 식사 때부터 거침없이 텐션이 올라갔다. 보기 드물게 들떴던 것 같다. 오늘 먹고 죽어보자며 술잔을 연신 들어 올렸다. 진로 소주병과 테라 맥주병이 테이블에 쌓여갔고, 1차가 2차가 되었고, 사람들의 흥도 점점 더해졌다. 3차는 노래방이었다. K씨는 노래까지 잘 불렀다. 사람들은 그녀를 진정한 "사기캐"라며 치켜세웠다. K씨도 은근히 상황을 즐기는 듯 보였다. 신이 나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맥주를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모두가 넘치도록 생그러운 에너지를 갖고 있는데, 나만 홀로 급격히 체력이 방전돼가고 있었다. 결국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가방을 들고 자리를 떴다.
이제 내겐 먹고 죽어보자며 술을 마시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지 못하는 일도, 맺을 수 없는 관계도, 알 수 없는 말도 생기고 있다. 어릴 적 공감하지 못했던 <위아영> 주인공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난 마흔넷이야. 못 할 일도 있고, 못 가질 것들도 있는 나이."
[ 인생은 오마쥬 ]
영화 속 한 장면이 뜻하지 않게 내 인생에서 리플레이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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