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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은 Oct 16. 2019

새의 선물의 의미, 그리고 진희에 대하여

with 「새의 선물」

진희,


바쁜 한 달을 보냈다.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독서 모임에 반드시 읽어가야만 하는 책은 바로 4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인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었지만, 다행히 내용은 어렵지 않았고, 매력적인 문장들로 가득하여 밑줄은 늘어났으며, 페이지도 술술 넘어갔다. 그런데, 그래서, 그리하여,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일까?’라는 생각만 몇 시간 째, 커피 한 잔으로 장시간 카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보여지는 나’는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인간이어야 하므로 카페 주인의 눈치를 보며 맛없게 생긴 햄에그 크레페를 추가로 주문했다.


은희경. 사실 나는 직업상(국어 문제집을 만드는 편집자다.) 은희경 작가의 작품을 시험지나 참고서의 지문에서 부분적으로 만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지문에 제시된 작품의 일부분과 서술상의 특징 정도를 겉핥기 식으로 가볍게 알고 있을 뿐, 부끄럽지만 은희경의 그 어떤 작품도 전체를 읽어본 적이 없다. 대학에서 ‘초점 화자’를 배울 때 은희경의 작품이 예시로 사용된 것이 기억난다. 제라르 주네트는 ‘누가 말하는가’의 측면에서 화자가 있다면, ‘누가 보는가’의 측면에서는 초점 화자가 있다고 했다. 화자와 초점 화자가 분리되더라도 여전히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화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새의 선물이 여타의 성장 소설과 다르다고 느낀 이유를 내 나름의 해석으로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이 소설은 분명 어린 ‘진희’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러나 ‘진희’가 결코 어린아이답지 않은 이유는 단지 성숙한 아이여서가 아니라, 서른여덟의 ‘진희’가 하는 말과 열두 살의 ‘진희’가 하는 말이 서로 다르지 않아서가 아닐까? ‘진희’는 열두 살에 이미 정신적으로 성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 어린 ‘진희’는 서른여덟의 ‘진희’처럼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니 서사의 구조에서 액자 속 이야기의 화자를 여전히 서른여덟의 ‘진희’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하지만 분명 초점 화자는 어린 ‘진희’가 차지하고 있으므로, 이렇게 어색하고 똑똑하며, 냉소적인 시선의 어린 화자가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아마도 그것을 의도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내용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새의 선물’이라는 제목을 작품을 마무리한 후에 정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새의 선물’을 제목으로 정한 의도가 분명히 있을 터인데,  제목에 대한 궁금증을 묻는 인터뷰 내용을 찾아보았지만, 작가는 의도가 잘 전달될 것 같지 않아 책에 시 ‘새의 선물’ 전문을 실었다고만 했다. 독자의 몫으로 두는 것도 작가의 미덕이므로 이 역시 여기저기서 찾아본 내용을 토대로 내 나름의 해석으로 이해해 보겠다.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주자

해는 그의 어린 시절 옥으로 들어가버렸네

-자크 프레베르, 「새의 선물」 전문

시의 내용을 보면 그냥 새가 아니라 ‘아주 늙은 앵무새’가 등장한다. ‘해’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선물하지만,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간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작가의 말’에서 힌트를 얻어 보자. ‘아주 늙은 앵무새’는 시간 또는 세월이고, ‘해바라기 씨앗’은 세월이 가져다준 편안함 혹은 행복이며, ‘해’는 작가이자 작가의 분신인 ‘진희’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작가는 왜 세월이 가져다준 편안함과 행복을 거부하고 다시 아픔의 공간인 열두 살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려 하는 것일까?

 

내가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힘이 나.’

‘시속 백이십 킬로미터로 집을 향해 가고 있던 나는 이제 시속 백이십 킬로미터로 점점 집에서 멀어진다.’

 
불행하다고 느낄 때 힘이 나고, 집으로 향하면서도 집에서 멀어진다는 ‘작가의 말’에서 ‘새의 선물’을 제목으로 정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작가는 누구나 그렇듯 자신을 사랑하고 삶에 집착하며 쉽게 상처 받는 인간이다. 그래서 냉소라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여 상처를 덮고 살아가지만 불행을 직면할 때 힘을 내는 특유의 성격으로 인해 유년 시절에 남아 있으려고 한 것은 아닐까.

엄마를 잃고 일찍 성장해버린 열두 살의 ‘진희’가 냉소를 터득하고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를 구별하여 살아가던 그 방식 그대로 서른여덟의 ‘진희’는 여전히 냉소를 방패 삼아 살고 있다.

이와 더불어 서사의 구조가 액자식 구조이기는 하나 액자의 안과 밖의 화자는 말투나 인식의 범위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액자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리고 늦은 밤 자동차로 그를 데려다주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작가의 말’은 에필로그의 내용과 이어진다. 이러한 경계의 모호성으로 인해 작가와 서른여덟의 ‘진희’ 그리고 열두 살의 ‘진희’는 모두 연결되는데, 아마도 작가는 현재의 불행에서 힘을 내기 위해 계속해서 유년 시절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여타의 성장 소설과는 달리 어른 같은 아이인 진희의 시선으로 개되는 야기 속에 삶을 대하는 태도인식이 사뭇 깊이 있게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삶에 집착하면 할수록 상처의 내압을 견디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다.’

‘세상을 서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상처 받게 마련이다.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 따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서정성 자체가 고통에 대한 면역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는 ‘진희’를 내세워 삶에 대한 집착과 사랑에서 받은 상처를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경계하고 긴장하며 살아가는 것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즉 냉소를 통해 삶에서 받은 상처를 덮어가며 삶에 거리를 두고 사는 듯하지만, 삶의 방식이 다를 뿐,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대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과 대면하고 살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삶이 이어진다.’ 그것이 ‘새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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