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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은 Dec 21. 2021

잘 절여진 줄 알았는데...

예민함에 절여진 배추라니.

나는 아직 마흔이 채 되지 않았지만(마지막 삼십대...라니) 사회 생활에서는 어느덧 푹 절여진 배추마냥 짭짤하게 절여져 어지간히 매운 고춧가루는 다 품어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주 아주 쎈 청양 고춧가루로 퍽퍽 발리는 날이 있다.


"은이 팀장! 지금 하는 프로젝트 말이에요! 그거 일단 보류합시다."
(대표님 등장이시다! 참고로 나는 아주 작은 출판사에 다니고 있다. 우리 회사만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진행하던 프로젝트는 '빙빙 돌아가는 회전 목마처럼' 끊임없이 돌고 돈다. 효율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분노의 어쨌든!)

"네? 왜...죠?"

"그거보다는 이게 더 시급해! 이것부터 진행합시다.  (긴 설명) 그럼...2주 정도면 될까요? "

절여질 대로 절여진 줄 알았는데, 속에서 또 용광로가 끓어 오른다.

"아! 물론, 2주 안에 꼭 끝내라는 뜻은 아니에요. 오해는 말아주세요!"
 
선비 같은 말투 이면에 담긴 강제성.
분명 시키는 대로 하라고 나를 뽑은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왜이리 반항을 하고 싶냐.

마스크 속으로 썩소를 감추고,

"일단, 해보는 데 까지는 해보겠지만, 대표님 2주는 정말 빠듯해요. ㅠㅠ
한...하루 이틀은 더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루 이틀'이라니...뭘 믿고 내 입에서 그딴 어휘가 튀어나왔을까....
종지같은 사람!

그런 날엔

오랜 친구들이 모여 있는 톡방에 아무말 대잔치를 겨루며

털털 털어낸다.


나:  해외로 뜨고 싶어.
미국 사는 친구:  제발 미국으로 와~~~
자영업자 친구: 해외고 나발이고 딱 하루만 아니 한 시간만 혼자 있고 싶다!!!
딩크 친구: 나랑 같이 뜨자!
독박 육아 친구: (대답 없음)


그냥 생각나는 말을 툭 던지면 달려 들어 나와 놀아주는 친구들.

그런데, 문득 별 시답잖은 친구의 농담에

기분이 상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퍽퍽 발린 그날 저녁,
결혼한지 얼마 안된 새색시 코스프레로 차돌 된장찌개와 골뱅이 무침을 상에 올려 놓고
(메뉴가 너무 술안주 같네. ㅎㅎㅎ)
의자에 올라가 공중에서 내려다 보이는 샷으로다가 한장 찍어 톡방에 올린다.

나: (사진) 이거 내가 만든 거!
자영업자 친구: 오올~~~~~
(바쁜 시간 대 자주 해주는 리액션 어휘...고마워 ㅠㅠ )
딩크 친구: ㅋㅋㅋ 상추 무침이니?ㅋㅋㅋ
(그래! 상추를 크게 썰었다...)
독박 육아 친구: 오오! 근데 예쁘게 좀 담지! ㅎㅎㅎ
(뭐 눈으로 먹어?)
나: 우리집 오면 내가 해줄게!
딩크 친구: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를 두 번이나?)
독박 육아 친구: 그래 그냥 시켜먹자! 힘들어 힘들어!
(힘들어도 두 번이나?)
나: 오지마 오지마!
(나도 두 번)


안다! 이건,

내가 예민한 거다.

나는 원래 음식도 몇번 해본 적 없는 똥손이 맞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저런 농담에 나는 왜이리 날이 섰던 걸까.
아! 청양 고춧가루를 때려 맞았었지....

분명, 옛날의 어린 우리들은 (어린 우리들은 깡 시골에서 초중고를 내내 같이 다녔다.) 이보다 더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았고, 풍자와 해학의 기법을 구사하며 서로를 짖궃게 놀려대기 바빴으며, 씩씩대고 싸우기도 했지만, 그래도 항상 깔깔 웃는 웃음이 이겼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는  덜 예민했거나, 어쩌면 짭짤하게 절여진 어른의 나보다 더 여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잘 절여진 줄 알았는데...

살짝만 건드려도 뾰족한 예민함이 돋아나는구나.


위로와 공감의 언어가 필요한 절여진 배추에게

깔깔 웃음이 들어올 자리는 점점 비좁아졌다.

그래서인지 별거 아닌 말이 별거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잦아진다.


문득문득 아무 생각없이 배꼽빠지게 웃고 싶다.

어린 내가 여유만만하게 받아주었던 것처럼,
깔깔 웃으며 같이 나이들어 가기를 바라며.


지금 많이 절여져서 그래.

익으면 나아질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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