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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춤을 춘 날

by 유천

내게 아내를 소개해준 사람은 대학 시절 절친의 부인이었다. 비껴간 인연으로 인해 스산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내가 안 되어 보였는지 당시 신혼이었던 절친은 부인의 옆구리를 자꾸 찔렀다. 그 부인은 나와 여러 번 만나기는 했지만 사실 나에 대해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었고, 또한 매우 신중한 성격이라 함부로 누군가 소개해주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도 굳이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는데...


4월 초순 어느 날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야, 너 사람 만나봐라. **씨 친구인데 정말 좋은 사람이라더라.”

나는 좀 시큰둥했다. 실연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라 굳이 새 사람을 만나고픈 마음이 강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좋은 인상을 갖고 있던 절친의 부인이 소개해주는 사람이니 약간의 기대도 있어 약속을 잡았다. 장소는 모교 앞 카페. 우리 네 사람 모두 같은 대학 출신이기에 익숙한 지역으로 정한 것이었다.


카페에 앉아 있으니 한 눈에도 직장인으로 보이는 옷차림의 여자가 들어왔다. 그 전까지 소개팅으로 만난 사람은 예외 없이 무릎 정도의 치마를 입고 나왔다. 그런데 이 사람은 치마가 아닌 바지 정장을 입었군. 개성이 강한 사람인가. 이런 가벼운 생각을 하며 인사를 나눴다. 유순하지만 긴장한 표정이었다.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첫눈에 반한 만남은 아니었다. 아마 학교 얘기, 직장 얘기, 서로의 친구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를 점점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저녁을 먹으면서부터였다. 남녀간의 첫만남에서는 대개 조금 ‘우아한’ 메뉴를 택하기 마련이지만 그날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삼계탕집에 들어갔다. 당시 그녀와 나는 모두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기왕 먹을 것, 영양가 있는 것을 먹자는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선선히 응했다. 아,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있는 사람이구나.


삼계탕을 먹은 후에는 탁구를 쳤다. 88올림픽 이후 대학가에는 탁구장이 많이 생겼는데 문득 엉뚱하게 그녀와 탁구를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만남에서 정장을 입은 채 탁구를 치는 풍경이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또다시 선선히 응했다.

“저도 탁구 좋아해요. 잘 치지는 못하지만.”

탁구장 주인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구두를 신은 채 쿵쿵거리며 탁구장을 누비는 것도 색다른 재미였다.


탁구장에서 나와서는 비디오방에 가서 영화를 보았다. 제라르 데빠르듀가 나온 음악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 그녀가 대학 시절 클래식 기타 동아리에서 활동했다는 말을 듣고 고른 영화였다.


나중에 생각하면 아내는 내가 조금 특이한 사람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특히 첫만남에 어두운 비디오방에 둘이 앉아 영화를 보자는 제안은 약간의 오해를 살 여지도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순수한 마음에 극장의 대안으로 제안한 것이었고 그 의도대로 얌전히 영화만 감상하고 나왔다.


첫만남에서 확인한 그녀는 기본적으로 배려가 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젊은 남녀 사이에 화학작용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요소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는 두 번째 데이트를 신청하기 전 약간 망설였다. 그 전까지 나를 애타게 했던 여인들이 지녔던 그 무엇인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나를 애타게 했던 여인들은 결국 인연이 아니지 않았는가. 이 여인은 그런 점이 없기 때문에 나를 편안하게 해주고 있지 않은가.


나의 연애사를 다 알고 있는 친구에게 그런 심정을 솔직하게 얘기하니 친구는 부인에게 다른 사람을 소개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부인에게서 이런 답이 돌아왔다.

“걔보다 더 좋은 사람은 없어요. 걔가 맞지 않으면 나도 어쩔 수 없어요.”


그 말을 전해듣자 나는 내가 아직 모르는 매력이 더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한 번 보고 사람을 판단하려한 데 대한 반성이 들었다. 그리하여 두 번째 데이트를 신청하며 가능한 한 선입견을 배제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대화를 나눠보자고 마음먹었다.


4월 중순의 어느 화창한 날, 모교 캠퍼스의 잔디에 앉아 슈크림 빵과 커피를 나누며 나는 당시 읽고 있던 양귀자의 수필을 그녀에게 읽어주었다. 별 말없이 조용히 듣고 있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내 마음은 비로소 봄을 맞은 목련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라면 같이 할 수 있겠구나.


보름 쯤 후 나는 느닷없이 청혼을 했다. 길을 걷다가 문득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었지만 심리적으로 전혀 준비 없는 상황은 아니었다.


나의 청혼에 대한 아내의 반응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아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딴~딴~딴~ 하고 이름 모를 곡조를 흥얼거리면서 가볍게 몇 발짝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었다. 그 모습은 마치 디즈니의 “밤비”에서 밤비가 태어나 처음 맞는 봄을 신기해하며 추는 서춘 춤 같았다. 나는 잠시 멍하니 아내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중에 그 춤이 무슨 춤이었냐고 물으면 아내는 춤 춘 적이 없다며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그렇게 시치미를 뗄 때 잔주름이 잡히기 시작한 아내의 얼굴에 홍조가 깃드는 걸 보면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함께 한 세월 만큼 추억이 쌓여간다. 추억을 되새기는 일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한 자구책인지도 모르지만 기억이야 말로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이다. 기억을 잃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풍부한 추억을 가진 사람이 노년에 치매 위험이 적고 우울증에도 덜 걸린다는 연구도 있다. 그렇다면 추억이 많은 부부가 노년기에도 원만하게 지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본다. 훗날 아내는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 오늘 나와 아내는 어떤 추억을 만들어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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