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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천 Sep 20. 2021

햅쌀밥

어릴 적 동네에서는 추석이 다가오면 타작을 하는 집이 나오기 시작했다. 벼농사를 짓지 않은 우리집에서 햅쌀밥은 귀한 밥이었다. 어머니가 타작을 한 집에서 얻어 온 약간의 햅쌀이 햅쌀밥을 맛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 쌀이 부족했던 시대, 정부에서는 분식을 장려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도시락에 잡곡이 일정량 이상 섞여 있는 지 검사하던 시대였다.      


“이거 먹어봐라. 햅쌀밥이다.”     


보리가 섞인 정부미로 지은 거무스름하고 거친 평소의 밥과 달리 희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던 그 밥은 첫술을 입에 넣으면 고소한 밥맛이 입에 확 퍼지면서 몇 번 씹을 사이도 없이 꿀꺽 넘어갔다.      


그런 추억을 들려주며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도 그런 기억 있어?”

“없는데? 외할아버지가 농사를 많이 지으셨잖아요. 그래서 쌀이 부족했던 적은 없었어요.”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충청도 부농에서 자란 아내는 햅쌀밥의 귀한 맛을 모른다.     


저녁을 먹고 새로 구입한 커피메이커로 딸 아이 몫까지 3인분의 커피를 내리고 거품을 낸 우유를 부어 라떼를 만든다. 설거지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아이가 부탁했던 차이코프스키 CD를 찾아준다.     


일부러 궁핍하게 살 필요는 없지만 간절히 바라다가 비로소 맛본 경험은 오래 간다. 부족했던 시절이었기에 더 강했던 갈망이 여러 가지로 풍요로워진 시대에 사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형태로 형성되고 있는지 나는 잘 모른다.     


하긴 어느 시대건 비교의 대상은 동시대 사람들이지 오십 년, 백 년 전 사람은 아니다. 인간은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것은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 든 사람이 젊은이에게 하는 얘기는 잔소리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 때는 말이야...”     


그러면 젊은이들은 벌써 귀를 닫는다.     


아이를 볼 때마다 다짐하고는 한다. 아이의 앞날이 걱정되더라도 내 속에만 담아두자고. 자기 나름의 경험을 쌓으며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족한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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